[벤처에세이 (8)] 세계를 앞서간 3차원 초음파

3차원 초음파 진단기로 ‘메이저리그’ 입성
벤처 첫 코스피 상장으로 세계 진출자금 마련
오스트리아 크레츠社인수, 깜짝 놀랄 진단기 개발
국제 학회 결성해 임상 뒷받침… 글로벌 강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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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이 오스트리아 초음파 회사 크레츠와 합병한 뒤 최초로 실용화에 성공한 3차원 초음파 기기는 '병원에 돈을 벌어다 주는 장비' 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미국, 일본 등지로 빠르게 퍼져갔다. 오른쪽 사진은 1996년 합병 당시 공중에서 찍은 크레츠 회사 전경
세계시장 진입은 성공했다. 전 세계 70개국을 개척하고 한국 의료산업의 전문상사로서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변방의 강자에 불과한 것이 1995년까지의 메디슨 위상이었다. 중저가 이하의 초음파 진단기를 ‘GOLD QUALITY, SILVER PRICE, ROYAL SERVICE’ 라는 슬로건 하에 주로 마이너리그인 개업의 시장을 공략했던 것이다. GPS라 일컬어지는 GE, 필립스, 지멘스라는 3대 강자들은 고가의 장비로 메이저리그인 병원급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언제 마이너리그를 벗어나 메이저리그로 가는가는 1995년 메디슨의 전략적 과제였다. 준비 없이 GPS에 덤비면 결국은 장렬한 옥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전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여야 했다. 1995년 메디슨이 주식상장을 하게 된 이유가 이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당시에는 코스닥이 없었기에 메디슨은 벤처기업 최초로 코스피에 상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금 조달하고 드디어 우리의 오랜 과제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3차원 초음파 진단기였다.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2시간 가는 시골동네에 크레츠라는 초음파 회사가 있었다. 1952년 초음파 개발 이후 초음파 역사에 기념비적인 중요한 발명을 여러 번 한 연구중심 회사였다. 이 회사가 자랑하는 기술이 바로 3차원 초음파 진단기였다. 실제로 산모 뱃속의 태아 얼굴이 나오는 (화면이 찌그러지기는 했으나)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GPS를 긴장시킨 회사였다. 그러나 곧 GPS는 이 3차원 영상은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시하였다. 영상 한 장을 얻는 데 30분이 걸려 실용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메디슨의 디지털 초음파 기술과 3차원 초음파 기술이 결합하면 3차원 영상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1996년 4월 연간 이익 50억원인 회사가 감히 1,000만 유로를 투자하여 유럽 회사를 인수하는 사건을 벌이고 만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메디슨의 연구소 용사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밤을 지새우기 시작했다. 크레츠의 연구진들도 불타기 시작했다. 당시 후진국이라 여기던 한국의 중소기업이 감히 자신들을 인수한 것도 불쾌한데 연구경쟁에서까지 질 수는 없었다. 양사가 보유한 기술을 공개하고 메디슨이 제공하는 첨단 디지털 칩을 활용, 양사가 별개의 제품을 개발하는 경쟁의 결과는 세상이 놀란 실시간 3차원 초음파 진단기 두 종류였다. 메디슨이 세계 최초로 실용 가능한 3차원 초음파를 개발한 것이다.

3차원 초음파는 가히 혁명이었다. 뱃속 아기가 하품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부모들은 환호하였다. 기존에 판독이 어려운 핏줄의 입체 구조를 보는 등 3차원 초음파의 응용은 무궁무진했다. 전 세계의 초음파 강자들이 긴장하였다. 세계를 선도하는 토마스 제퍼슨, 일본 도쿄대 병원 등 일류 대학 병원에 진입이 시작됐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 엄청난 수익이 나올 것을 기대했던 꿈은 1년이 다 가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최첨단 병원에서 연구용으로 몇 대를 구입하고 실제 임상을 하는 대학병원들은 어떻게 사용할지를 몰라 구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진국 시장은 보험 수가가 등재되어야 하는데, 보험등재는 임상논문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했다. 제품개발이 전부라는 생각은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만 통용된 것이다. 선도전략(First Mover)에서는 제품개발과 더불어 임상개발이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한국 기업이 세계 최초로 제품을 개발, 블루오션 시장을 개척한 예가 당시까지는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임상 논문을 만들자. 그러려면 논문을 실어줄 저널이 있어야 하고 학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 3차원 초음파진단 학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한국이 주동하여 새로운 학회를 만들고 세계 학회의 대륙별 지회도 결성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각국의 최고수 초음파 교수들이 지회장, 임원을 노리고 제 발로 찾아왔다. 이분들께 3차원 초음파를 이용한 임상 응용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신속히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섰다. 논문들이 쌓여 가면서 새로운 임상기술에 보수적인 미국의 보험에서 1999년 드디어 3차원 초음파를 보험등재하였다. 이제 3차원 초음파는 실험적 장비가 아니라 병원에 돈을 벌어 주는 장비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장이라는 일본에서 GPS를 물리치고 수입 초음파 중 최대 시장점유를 하게 된다. 일본 최고가 초음파 진단기보다 두 배 비싼 2억 원 이상에 팔았다.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과 크레츠 인수라는 도박이 메디슨의 미치광이들을 만나 성공의 꽃을 피운 것이었다.

한국 초음파의 태두인 최병인 교수님(서울의대 방사선과장)은 혈혈단신 세계 초음파 학회 유치를 위하여 베를린에 입성했다. 호주는 이미 유치를 확신하고 파티준비까지 했다. 그러나 메디슨에 우호적인 골드버그, 큐르약 등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들의 지지로 한국이 막판 뒤집기 유치를 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사실 해외 사업인수 경험이 없던 터라 크레츠 인수 이후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게 큰 문제였다. 다들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개방과 자율이란 메디슨 방식은 통했다. 이전까지 각자의 기능적 역할만 하던 크레츠 직원들이 회사전체의 정보를 얻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면서 이들은 단순히 건전한 샐러리맨에서 메디슨식 미치광이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초기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금형에서 판금까지 내부 제작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부문별 소사장 분양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마음 고생하는 사장보다는 주당 40시간 근무의 여유 있는 샐러리맨을 선택하던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식옵션이 주어졌다. 한국의 메디슨 직원들은 집을 샀다는 소문이 퍼지자 더욱 변했다.

크레츠는 고석빈, 조동식 사장이 바통을 이어가며 키워 2000년 봄 하창원 이사가 유럽증시에 상장을 시켰다. 한때 시가 총액이 5억 유로에 달했다. 이때 투자 원금 이상인 3000만 유로를 회수했다. 내부 혁신을 넘어 M&A를 통한 개방 혁신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성공이었다.

글 : 이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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