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의 대한민국 벤처스토리 (2)] 가망없던 구로공단 회생비결, 1997년 ‘벤처집적시설’ 처방전

한국 산업발전의 역사를 보려면 서울 구로구 가산디지털단지로 가야 한다. 이곳은 45년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공수출 단지였다. 서울로 상경한 수많은 10대, 20대 여공들이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청춘을 바쳤던 곳이다. 그런 구로가 지금은 세계적인 첨단 벤처기업 단지로 변모해 디지털 코리아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1만개 이상의 벤처기업이 밀집된 세계적 벤처 생태계가 불과 10년 사이에 형성된 것은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디지털단지에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 정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그렇다면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벤처빌딩 제도다.

외환위기의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하던 1997년 11월 구로디지털단지의 첫 빌딩 기공식이 있었다. 한국 수출을 뒷받침했던 구로 수출산업단지는 당시 국가적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경쟁력을 잃은 공장들은 직원들이 떠나고 을씨년스럽게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벤처기업협회는 1997년 4월 허태열 당시 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에게 제의했다. “구로공단 내 기업들이 빨리 기술집약 업종으로 변해야 한다. 그 시발점은 공장이 아닌 벤처빌딩, 즉 벤처기업의 집적시설이다. 벤처빌딩에서 성공기업이 나오면 자연히 구로공단에도 벤처기업이 몰리게 된다. 한국의 새로운 미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허 이사장은 2주 후 바로 설계를 지시, 벤처빌딩은 11월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구로구 가산동은 1997년 11월 디지털단지가 들어서기 전만해도 국가적인 애물단지였다.(좌) 그러나 벤처빌딩이 만들어지고 벤처기업들이 하나둘씩 입주하면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되고 있다.(우) 오스템 임플란트, 마크로젠, 인피니트, 엠텍비전, 유비케어, 아이레보, 컴투스 등 코스닥 스타기업들도 모두 가산디지털단지 출신이다.

서울 구로구 가산동은 1997년 11월 디지털단지가 들어서기 전만해도 국가적인 애물단지였다.(좌) 그러나 벤처빌딩이 만들어지고 벤처기업들이 하나둘씩 입주하면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되고 있다.(우) 오스템 임플란트, 마크로젠, 인피니트, 엠텍비전, 유비케어, 아이레보, 컴투스 등 코스닥 스타기업들도 모두 가산디지털단지 출신이다.
벤처빌딩 제도는 같은 해 벤처기업특별법에 반영된 제도로, 또 하나의 한국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벤처기업협회의 주장은 ‘벤처기업의 생명은 네트워크다. 벤처는 자신의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주변역량과 제휴해야 한다. 개별기업이 아니고 생태계간 경쟁이다. 특히 지식사회에서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식, 비공식적으로 공유해야 살아남는다. 이런 점을 해결할 수 있는 벤처 생태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디지털단지에 있는 1만여 개 기업과 수백 개의 벤처빌딩은 정부에서 단 한 푼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은 바가 없다. 단지 벤처빌딩 제도에 근거한 취득세, 등록세 혜택과 벤처 세제지원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디지털단지는 직접적인 정부지원보다 창업하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시장경제의 대명제에 부합하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한다.

참고로 전국적으로 형성된 테크노파크는 필자도 초대 선정위원장으로 참여했으나 벤처빌딩 제도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직접 투자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생력이 확보되지 않고 있다. 계속적으로 정부재정이 투입되고 있다. 직접지원은 규제를 낳고 결국 관료화한다는 점에서 정부의 지원은 단기간에 인프라 구축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디지털단지는 이제 1만여 개의 벤처기업이 밤낮없이 연구 개발에 몰입하는 잠들지 않는 지식단지가 됐다. 과거 생산위주의 중소기업 단지에서 연구개발위주의 벤처기업 생태계로 변모한 것이다. 여기에서 오스템, 임플란트, 마크로젠, 인피니트, 엠텍비전, 유비케어, 아이레보, 컴투스 등 수많은 코스닥 스타 기업들이 탄생했고 지금도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하고 있다. 젊은 연구원들이 담소하며 커피를 마시는 벤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의 소중한 자산이 벤처빌딩 제도를 통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단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대학이다. 지식사회에서 대학과 산업계는 융합돼야 한다. 전세계 모든 벤처단지는 세계적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구로 가산에는 대학이 없다. 서울산업대학교가 분교 형태로 강의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본격적인 연구 중심의 대학이 자리 잡아야한다. 벤처빌딩은 경기도로도 확산되고 있다. 경기도와 공동 추진하여 입주를 시작한 판교 벤처밸리는 또 하나의 세계적인 벤처 생태계가 형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인천시의 송도 신도시를 비롯해 대전 원주 포항 부산 광주 등 전국으로 벤처 생태계는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직접 지원에 의한 관료화를 경계해야 성공한다는 점에서 구로 가산디지털단지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글 : 이민화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