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김민철 “우리 회의나 할까?”

집에 티비가 없으니까 부모님댁에 가면 정말 얼빠진 얼굴로 티비를 본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아이들이 넋놓고 티비보는 것처럼 본단다. 채널을 뒤적거려가면서 보면, 티비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보통 광고다.

한 때 광고를 보면서 나는 “광고는 거품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하지만 광고는 브랜드나 제품의 가장 좋은 면만 보여준다. 그 정도라면, 광고가 거품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많은 광고들은 있지도 않은 허상을 표현하는 건 아닐까? 라고 느꼈다. 브랜드나 제품이 표방하고 싶은 것,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을 강렬한 비주얼을 통해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바보 상자를 통해 세뇌하는 과정. 그게 광고라 생각했다. 덧붙여 그 시장이 크다는 사실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 사람들이 포장하는 재주가 샘났을지도 모른다.

웹, 모바일 기획일을 하면서,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으려고 시작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이 공간을 사람들은 뭐라고 인식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가 만드는 공간, 우리가 정의한 공간을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까, 뭐라고 느낄까, 뭘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할까,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가장 첫번째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지금까지 주로 생각해왔던 것들은 “뭘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할까?” 라는 부분이다. 공간과 기능 설계를 해서 사람들이 내가 의도한 대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가장 나의 일반적인 업무였는데 요즘엔 사고의 폭이 좀 달라졌다. 공간과 기능 설계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보다 요즘은 컨셉(워딩, 디자인, 스토리 등등)을 통해서 의도를 전달하는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보기엔 정말 좋은 타이밍.

책은 세계 최고의 광고 회사 TBWA 에서 자신들이 만들었던 광고 4개에 대해서 아이디어가 진화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이다. 이 묘사는 7년째 TBWA 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저자 김민철님의 회의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광고회사는 다른 회사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더 잘알고 있는 것처럼 포인트를 잡아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 아이데이션 과정, 광고를 만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도록 묘사되어있다. 아이데이션 중간 과정의 광고 카피나 시안이 그대로 있어서 어떻게 돌고 돌고 돌았는지, 어떻게 다듬어졌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포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분야 사람이 보기에는 충분히 생생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느낀건 안심이다. 아이데이션이라는 것, 여러 사람이 머리를 쥐어싸고 이야기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나만 이렇게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고, 이렇게 해서 좋은 결과물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안심하게 만들어주었다. 최근 Rework 처럼 회의는 최악이야! 류의 책만 읽어오다가 반대의 표현(뭐,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양쪽이 같을 수 있지만)을 읽어서 즐거웠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회의 시간을 사랑하는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

2012년 1월에 읽은 비소설류에서 최고의 책. 팀단위로 아이데이션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p.18 프롤로그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회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아는 것은 있다. 회의만큼 기적적인 순간은 없다는 것. 회의실에 들어올 때는 빈손일지라도 나갈 때는 빈손일 수 없다는 것. 집중해서 하는 회의 한 시간은 혼자 아이디어를 내는 스물네 시간보다 가치 있다는 것. 그만큼 회의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화학 작용은 중요하다는 것. 회의만 효율적으로 잘 해도 일은 반 이상으로 줄어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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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품위유지, 폰카 기능으로 이빨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

p.37 SK 텔레콤 경쟁 PT – 명사를 동사로 바꾸는 작업

회의는 아직 초반이었다. 사소한 아이디어에 집착하기보다는, 각자의 느낌과 평소에 알고 있던 것들을 꼼꼼히 짚어 나가며 큰 틀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했다. 틀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15초  TV 광고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 슬로건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혹은 헤드라인이 어떻게 그림이 어때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고민하는 건 불필요하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완벽한 전체 틀을 재조합하느니, 각자의 사소하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디어들을 짜 맞춰 더 큰 틀을 만드는 것이 나았다. 그건 같이 회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하고 있는 회의에 대한 예의였다. 
 
‘애플은 반대하고, IBM 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이키는 권고하고, 버진은 빛을 비추고, 소니는 꿈을 꾸고, 베네통은 저항하고…. . 나는 댄 위든이 “브랜드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한 말을 믿는다 – 장 마리 드루

p.44 SK텔레콤 경쟁 PT – 될까? 될까?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그렇게 주저했을까 의문이 든다. 이미 우리 손에 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확신이 없었다. 99퍼센트의 확신이 1퍼센트의 의심을 이기지 못했다. 아직은 ‘된다!’보다는 ‘될까?’가 우세했다. 우리에게는 확신의 날이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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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캔버스하다
p.124 LG엑스캔버스 경쟁 PT – 회의에서는 무조건 말할 것

“지금 다시 화질을 이야기하는 건, 통화품질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인 거죠. 지금 저희가 가려는 길은 이를 테면 ‘생활의 중심’의 방향과 같은 거 같아요. 통화 품질만 이야기하던 시장을 ‘생활의 중심’캠페인이 사소한 휴대폰 에피소드들로 확 꺾어 놨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엑스캔버스의 사소한 부가 서비스들도 언뜻 보면 화질에 비해서 너무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멀리 보면 더 이상 부가 서비스가 아닌 것 같아요.”

역시 말을 하다 보면 정리가 된다. ‘내가 언제 이런 거시적인 것을 생각했지?’ 싶은 말들이 술술 흘러나오는 법이다. 그러니 회의에서는 무조건 말할 것. 말이 되든 말든 말할 것. 자기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이 훌륭한 말로 둔갑하는 법이니까.

p.128

팀장님이 회의 시간에 늦는 것만큼 싫어하는 것. 바로 회의실에 나서면서 각자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준비해오지 않는다면 다음 회의에 모여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신념 하에 팀장님은 언제나 회의가 끝날 때 말씀하신다. “각자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자.” 물론 모르겠다면 다시 물어 보면 된다. 무지는 결코 흠이 될 수 없으니까, 겁내지 말고. 당당하게. 정말 겁을 내야 하는 것은 다음 회의까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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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브로드밴드
p.196 SK브로드밴드 경쟁 PT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 느낌

단어 몇 개와 전에 읽었던 책, 영화 한 편으로 팀 사람들 모두 머리속에 같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약 ‘나니아 연대기’를 읽지도 않은 사람에게, ‘나니아 연대기’의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면 회의는 더 길어졌을 것이다. ‘몬스터 주식회사’를 말했을 때 모두가 단박에 알아듣지 못했다면, 모두 각자의 그림을 머리에 그리며 헤매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이 팀 사람들 모두 아이디어를 길어 올릴 수 있는 토양이 넓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같은 곳을 보게 되었는데, 더 이상 무슨 회의를 하겠는가? 각자 머리속의 엔터 느낌을 구체화시키자고 말하며 회의는 끝났다. 오늘 회의 시간은 30분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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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서, 이것도 또 하나의 광고인가! 싶을 정도로 빠져들었던 e편한 세상
p.271 대림 e-편한 세상 PT

언뜻보면 아파트 본질을 이야기하는 카피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인생의 가치에 대한 화두인 거지. 단순히 팩트 광고를 넘어서 화두를 던져야 할 것 같아.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아파트 광고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붐업’도 되고 그래서 사람들의 입을 타고 ‘노이즈’를 일으키며, 그리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광고. 뭔놈의 그런 광고가 다 있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틀 동안 AE들과 제작팀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가 이거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사람들은 이렇게나 높은 기줄을 세워 놓고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걸.

p.286

“진심에 대한 철학을 던져야 할 것 같아. 뭔가 거대담론, 아파트에 관한 카피 같지만 언뜻 보기에는 인생의 지침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 책상 앞에 붙여놓을 수 있고, 아빠는 아침에 신문을 넘기다가 스크랩할 수 있는 .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 광고처럼. 카피라이터들은 ‘진심/진실’을 헤드라인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바디 카피를 써 봤으면 좋겠어.”

“다시 Impossible is nothing 이나 Think different 쪽으로 가네요.”

“말하자면 그런거지. 물론 이쪽은 양약 처방이 아니라 한약 처방이야. 즉각적으로 시장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을지라도, 장기적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데 효과적일 것 같다는 거지.

그러면서 팀장님은 즉각적으로 카피를 읊었다. 그동안 인생은 역시나 불공평하다는 생각과(왜 저분에게만 저런 능력을 주셨지?) 역시 인생엔 공짜가 없다는 생각과(20년 광고했는데 저 정도도 안 되면 불공평하긴 하지.) 딴 생각 말고 얼른 받아 적자는 본능이 합쳐진 우리는 팀장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옥 같은 카피를 놀라운 속도로 받아적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는 거야.”라고 덧붙였지만, 20년차 내공의 애드립 카피는 잘 받아 적은 후에 잘 다듬기만 해도 훌륭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글 : 익살
출처 : http://story.isloco.com/230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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