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욱의 생각의 단편] 나이를 잊고 일한다는 것

미국에서 일하다 보면 여러 면에서 한국의 직장문화와 다른 차이를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서로 나이에 비교적 연연해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직장문화의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연공서열이나 장유유서의 개념이 희박한 미국 회사에서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상관이거나,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부하로 두고 일하는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후배가 자기보다 먼저 승진하거나, 나이는 들어 가는데 일정 직급 이상 승진하지 못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직을 떠나야 하는 한국 문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따로 존대어가 없는 영어를 쓴다는 것이 크다. 상하관계를 의식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호칭이나 직함을 쓰지 않고 이름만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도 크게 작용한다. 회사 사장에게 “정욱” 하고 이름만으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어습관 외에 제도적인 뒷받침도 크다. 직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배제하기 위해서 많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3년 전 라이코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사장도 직원들의 인적사항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80여명 되는 직원들을 좀 더 잘 알고 싶어서 인사담당 매니저에게 직원들의 신상파일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사장도 직원들의 나이·인종·결혼 여부 등의 인적사항은 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인사 업무상 필요한 담당 직원 이외에는 누구도 직원들 개개인의 인적사항을 알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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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당시 HR매니저 존이 내게 준 메모.
 직원을 채용할 때도 내가 최종면접을 하겠다고 하니 그는 “면접 때 물어봐서는 안 될 것”이 적힌 메모를 한 장 보여주었다. 그 메모에는 지원자의 나이, 종교 등은 물론이고 결혼 여부, 자녀가 몇 명인지, 아이를 가질 예정인지, 시민권은 갖고 있는지, 질병 이력이 있는지 등을 물어봐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또 고교나 대학을 언제 졸업했는지, 어떤 명절을 쇠는지, 어떤 억양을 쓰는지 등 나이, 종교, 출신국가 등을 유추해낼 수 있는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력서에 사진, 주민등록번호, 키, 몸무게, 부모의 직업·학력까지 적는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직장에서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는 가급적 개인의 인적사항을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선입관을 갖지 않게 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었다.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지 나이, 성별, 인종 등이 무슨 상관인가. 물론 사람이 일하는 회사이니 친해지면 비공식적으로 나이나 결혼 여부 등 개인 신상을 대충 알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채용 과정에서는 최대한 그런 요소를 배제하고 해당 직무에 적합한 사람인지만을 본다.
 
 2년 전부터 인사담당 부장으로 나와 함께 일한 다이애나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나는 50살 정도로 생각했는데 한번도 나이를 물어본 일이 없었다. 같이 일하면서 나이가 부담스럽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의 다양한 경험과 연륜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조직을 원만하게 운영해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최근 처음으로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내 추측보다 10살이나 많은 60살이었다.
 
 한국의 직장에서 60살 여성이 자기 아들뻘을 상관이나 동료로 삼고 부담 없이 일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렇게 된 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소수자들이 줄기차게 차별에 항의하고 소송을 내어 고용차별을 철폐하는 법안이 제정되는 등 계속해서 감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리도 진지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7월 3일자 한겨레신문 오피니언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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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문화는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이야기여서 한겨레신문에 칼럼형식으로 써봤다. 그런데 지면의 제한 때문에 쓰고 싶은 내용을 다 쓸 수 없었다.
 
윗 글을 읽고 오해하면 안될 것은 모든 미국회사의 문화가 다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회사에 따라 연장자를 존경하고 나이를 중히 여기는 회사도 있을 것이다. 채용시에 겉으로는 차별하지 않는 척하면서 은근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법적으로 물어봐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면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지원자의 자녀가 몇명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본인이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 사내 추천을 통해서 들어오는 경우 추천자를 통해서 알려지기도 한다.)
 
한번은 멀리서 출퇴근하는 어린 두 아이의 엄마를 채용할 일이 있었는데 한 임원이 “저 사람을 뽑으면 나중에 자르기 어렵다”고 뽑지 않는 것이 좋다고 내게 이야기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뽑았다) 새로 들어오는 직원이 아이 5명의 엄마라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는데 본인은 아주 불쾌해 하며 다음부터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었다.
 
한 백인직원은 남부의 어떤 회사에서 일한 일이 있었는데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는 문화에 질려서 그만뒀다는 얘기를 내게 한 일도 있었다. 회사마다 분위기가 참 많이 다르다.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어쨌든 한국과 비교해서는 미국의 직장문화가 상대적으로 휠씬 나이나 호칭, 상하관계를 덜 신경쓰고 일할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미국사람들이 특별히 더 나이스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어서 이렇게 나이차별이 없는 문화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 아니다.
 
언어습관 등의 문화도 있지만 이것은 오랜 시간동안 부당한 차별에 항거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소송대국이라는 것도 한 몫을 했다. 뭐든지 차별이 있다고 보면 계속해서 소송이 이어졌고 그래서 한단계씩 직장에서의 차별이 법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법시스템이 바로 서있고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미국도 한국못지 않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것은 물론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역시 상대적으로보면 한국보다는 휠씬 법이 서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HR디렉터인 다이애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국도 옛날에는 똑같았다”는 말을 한다. 매드맨이란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백인 남성들이 사무실에서 시가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남성위주의 세계, 여성들은 곱게 차려입고 비서나 타이피스트로만 일하는 세계가 매드맨에서는 펼쳐진다. 그 직장공간에 흑인이나 소수민족은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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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다이애나는 가끔 유럽에서 온 이력서를 보면 사진이나 생년월일, 여권번호 같은 개인정보들이 붙어있어서 놀란다고 한다.
 
나는 마틴 루터 킹목사를 비롯한 많은 선구자들 덕분에 미국내 아시안들도 비교적 차별없는 사회에서 살게 됐다고 생각한다.(세상을 바꾼 선구자들-여성마라톤의 경우 포스팅 참고)
 
한국에서도 말로만 차별이 있다고 하지말고 법적, 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만들어나가고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그 부당성을 끈질기게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글: 임정욱
출처: http://estima.wordpress.com/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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