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벤처생태계, 대기업에 달렸다

Source : http://flic.kr/p/4Cna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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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과 시장경험 풍부한 대기업 벤처의 혁신·창의 흡수토록 해 상생의 선순환 구조 뿌리내려야”

“이스라엘의 창조경제는 한국에 최적의 모델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투자와 미국 시장이란 배경을 갖고 있는 등 정치·사회·문화적 구조가 한국과 다르다.”

창조경제 전도사인 존 호킨스 박사의 내한 강연 내용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계 자본이 초기 이스라엘 벤처에 투자하고 기술사업화에 성공하면 인수합병을 통해 자금 선순환의 물꼬를 터주고, 유대계 기업들을 활용해 세계 시장 진입에 성공하면 유대인 네트워크가 나스닥 상장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이스라엘 국내 산업 인프라의 취약성을 미국의 유대인 네트워크가 메워주는 것이다. 물론 교육, 국방, 창업지원 등 배울 시스템은 분명히 있으나,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불가능한 모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진화단계에 맞는 대안은 무엇일까. 다시 호킨스 박사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나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이 많은 만큼 대기업의 강점과 조합해 나란히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한국의 창조경제 전략에서는 유대인 네트워크의 역할을 대기업이 담당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갖고 있는 시장과 자금을 활용해 창업 벤처들을 세계 시장으로 이끌고 가라는 의미다.

그러면, 어떻게 대기업과 벤처의 상생발전을 이룩할 것인가. 다시 호킨스 박사의 얘기를 인용해 보자. “창조기업의 무형자산 값을 어떻게 책정하고 발전시키느냐는 대기업과 벤처기업에도 시사점이 굉장히 클 것이다.” 즉 시장과 자금을 가진 대기업이 창조적 벤처기업에 초기 투자하고 제값에 인수합병하는 것이 한국형 창조경제 활성화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요즈마 그룹의 이갈 에를리히 회장도 “이스라엘과 한국의 문화가 다른 만큼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의문점을 갖게 된다. 이스라엘에는 벤처가 많고, 한국에는 세계적 규모의 기업들이 있다. 기업들에는 혁신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장이고 이를 위해서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뛰어난 벤처들에 투자하기 위한 펀드를 조성했다.

한국의 대기업과 벤처의 강점을 결합하는 것이 창조원가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대기업은 혁신에 약하고 벤처는 시장에 취약하다. 개별 벤처가 각개약진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라는 것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다. 세계시장 개척비는 개별 기업의 연구개발비보다 훨씬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 시장의 공유가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다. 개방 혁신과 개방 플랫폼이 창조경제에 절대적인 개념이 돼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 대기업의 벤처 투자가 규제에서 지원으로 바뀌어야 하고, 대기업의 벤처 인수합병을 비난할 게 아니라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 공정한 거래다. 사람 빼오기, 단가 후려치기 같은 편법 혹은 불법이 아니라, 정당한 가격을 주고 사는 대기업의 벤처 인수 선순환 전략이 필요하다. 야후가 텀블러를,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각각 우리 돈 1조원에 인수한 것은 공정거래를 통해 지속가능한 선순환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벤처의 사업을 베끼고 부당 경쟁을 통해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대기업의 일부 행태는 이제 엄격히 규제돼야 한다.

이스라엘 배우기 열풍으로 현지를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스라엘이 갖기 어려운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능력과 삼성 LG 현대 등 세계적 대기업, 여기에 국민이 하나가 돼 위기를 돌파하는 결집력, 싸이의 한류처럼 세계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파급력, ‘빨리빨리 정신’으로 대변되는 역동성 등 한국 과학 및 경제의 매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0년 한·이스라엘 벤처포럼에서 이스라엘은 한국 벤처를 부러워했다. 당시 한국 벤처는 1만개를 넘었고 이스라엘은 그 10분의 1에 불과했다. 지금도 한국 벤처의 총 매출은 이스라엘 국내총생산(GDP)보다 많고, 인구 1인당 벤처 기업수도 한국이 더 많다. 창조경제는 벤처의 부활을 의미하고 이를 위해 대·중소기업의 선순환 구조 정착이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아닌가 한다.

글 : 이민화 벤처기업協 명예회장, 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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