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DNA#3]“돈 안되는 사업만 하겠다”, 시민의 코딩 이영환 교수

출처: 건국대학교
출처: 건국대학교

‘어쩌다 교수(accidental professor)’

개인적으로 건국대 이영환 교수(국제학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페이스북에 적어놓은 ‘어쩌다(보니까)’라는 글귀 때문이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직업인 대학 교수직을 “우연하게 꿰찼다”고 자랑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욱이 그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회사를 설립하겠다”라며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교정에 있는 호수(일감호)가 보이는 연구실을 방문한 뒤 그에게 받은 첫인상은 ‘자유분방함’이었다. 한 쪽 귀퉁이에 기타가 놓여있고 등에 메는 가방(백팩)과 운동화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이영환 교수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했다.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그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이다. 그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가족들을 따라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도 “순전히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주경야독하며 꿈을 잃지 않았고 마침내 명문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에 들어가 컴퓨터과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 대학은 최초의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를 탄생시킨 대학이다.

그가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교수직 대신 사업가의 길을 택한 것은 ‘우연히 만들’ 인생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환 교수가 박사 학위를 받은 당시의 미국은 정보기술(IT) 분야 투자열기가 달아오르던 때였다. 이 교수는 자신이 연마한 기술을 믿고 통신기술 회사를 설립해 20년이 넘도록 운영했다. 그러던 도중 일 밖에 모르던 컴퓨터 과학자에게 또 한 번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사업체를 정리한 후 귀국해 건국대 교수로 임용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 살이었다. 그는 “멀리 돌아 왔다”는 말로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그 후 그는 7년 동안 학생들과 교정에서 만나면서 깨달은 점으로 2가지를 꼽았다. 우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이 몹시 즐겁다고 했다. 그러나 주제가 우리나라 대학과 교육의 현실로 이어지자 그의 목청이 높아졌다. 이영환 교수는 “물질 만능주의와 치열한 경쟁 때문에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하며 그가 이민을 가던 30년 전과 비교해도 교육환경이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 교수가 다시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된다. 물론 이번에 그가 구상하는 사업은 예전에 미국에서 벌였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교수는 “돈이 안 되는 사업만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영환 교수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휴대폰으로 신고할 수 있는 앱 ‘폭력 없는 우리 학교’를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 현재 이 앱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참여율 저조로 인해 서비스를 중단한 상태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집단 지성은 불모지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털어놓으며 “정보기술(IT)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이를 활용하는 소프트웨어(SW)와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두 번째 도전에 나서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한다.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시민의 코딩’이다. 사회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앱)를 개발해서 배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운영원칙도 독특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운영하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강조한다. 앱에 대한 아이디어는 사용자들로부터 받고 이를 구현해주는 핵심 엔지니어를 초빙할 계획이다. 이 교수는 ‘시민의 코딩’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앱 ‘도와줘요!’를 개발해서 이미 특허등록까지 마쳤다. 지금은 부지런히 투자자들을 찾아 다니고 있다.

‘시민의 코딩’은 두가지 이유로 특별한 관심이 가는 앱이다. 첫 번째로 관심이 가는 이유는 이 교수가 컴퓨터 과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오랫동안 사업체를 운영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도 집단 지성(이 교수는 이를 ‘집단지능 collective intelligence’이라고 표현한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고 싶다.

둘째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자로 지내던 청년이 컴퓨터 과학자가 된 개인적인 사연도 흥미롭다. 이 교수는 “ 1979년도에 KIST(과학기술연구원)에서 소프트웨어(SW) 개발자 양성교육을 받았는데 이 때의 경험이 훗날 컴퓨터 과학자, 즉 scientist 로서 활동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가 사회적 기업을 고집하는 데에는 오래 전에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보은의 뜻도 담겨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소박한 꿈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글 : 서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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