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은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가

후레자식 고소에 대해서 이번 포스팅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 사건을 통해 대중들의 웹툰에 대한 인식 수준도 알았고, 또 반대로 우리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의 문화에 대해 무지한지 또한 깨달았다. 알지 못하면 진단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사우스파크(South Park)
사우스파크(South Park)

1.웹툰이란 무엇인가?

먼저 웹툰고소자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웹툰에 대해 무지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웹툰 사용자 800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20대와 30대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SNS에 공유되는 생활툰 정도의 가벼운 소비를 한다. 이 들은 웹툰 소비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웹툰의 모든것을 안다던가, 소위 입덕을 한 이들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웹툰은 그저 광고판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은지 모른다.

1) 웹툰은 문화콘텐츠

제대로된 웹툰에 대한 이해를 하는 계층이라고 하면, 적어도 매주 꼭꼭 챙겨보는 웹툰이 있어야 한다. 웹툰과 단행본 만화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바로 연재성이다. 영화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 웹툰은 만화의 연장선이기는 하지만, 기존 코믹스 만화에 비해 제작 단가가 싸고 작가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그 소재, 주제의식면에서 자본의 의존도가 높은 다른 미디어 대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양하다.

때문에 검증된 콘텐츠만을 요구하는 방송이나 영화산업에서 웹툰을 눈여겨 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고민은 방송이나 영화는 많은 자본을 들여야 하는 만큼 위험도는 낮춰야 하지만, 소재와 주제의 참신성과는 역행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갭을 메꾸기위해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이 웹툰이다. 최근 소위 잘나가는 드라마, 영화가 웹툰이 원작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소자는 고소 내용 중 올바른 만화로서 뽀로로와 둘리를 언급했는데, 둘리도 김수정작가님의 원작을 안보신게 분명하다. 이라크전을 그린 회차는 내 일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중에 하나이다. 원래 둘리의 탄생 배경자체가 사회만화 그리려다가 잡혀갈까봐 동물로 바꾼건데..

— 95화 91년 3월 걸프전쟁II —

『둘리』는 시사적인 소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데, 이 에피소드는 특히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고 기억되는 것 같다. 둘리 일당은 편을 나누어 이라크 병사, 다국적군의 미군 병사와 손을 잡고 서로 대치하다가 이라크 병사와 미군 병사는 화해하는 등 중간까지는 개그톤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10페이지째에서 두 병사가 지뢰를 밟고 폭사하면서 일거에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후로는 부서진 시내, 부모가 죽고 혼자 남은 소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양을 뜯어먹는 등 참상이 이어지다가, 둘리 일당이 폭탄 줍기를 포기하고 떠난 후 부모가 죽은 소녀의 오빠가 바로 앞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 이라크 병사였음이 드러나면서 비극이 심화되고 그대로 에피소드가 끝난다. 전반적으로 반전 메세지가 뚜렷하다고 생각된다.

걸프전 당시 화제를 모았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작중에도 등장한다.

웹툰(만화)을 뽀로로 연령으로만 생각하는 것 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쥬니버를 쓰셔야 하는데 서비스를 잘못 선택하셨다.

웹툰의 역할은 대중과 호흡하는 다양성에 있다. 한국 아침드라마의 뻔한 스토리를 비웃는 그러한 도표도 있지만, 웹툰의 경우에는 이러한 도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뻔한 스토리는 거의 다 짤린다고 봐도 무방하고, 초반을 보고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웹툰은 거의 없다. 고소자의 후레자식 역시 마찬가지다. 표현 몇가지만 가지고 작품을 재단하기에는 곤란하다.

2) 웹툰의 저작물 규제

웹툰이인터넷 광고모델에 기반한 무료 콘텐츠다보니, 아무나 보고 아무나 가져다 쓰는 줄 아는 공공의 공연물인줄 아시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웹툰은 명백한 작가의 저작물이다. 또한 해당 저작물의 선택권은 독자에게 있다. 이를 개제하는 개제처인 플랫폼은 이를 적정고객에게 제시를 하는 것은 그들의 경쟁력이다. 다만 청소년보호법에 의하여서  정의된 19금의 작품에만 본인인증을 하도록 되어있다. 19금의 논란에서 주관이 개입되지 않을 수 있는 범위는 직접적인 표현에 대한 범위 뿐이다. 실제 칼에 찔리는 장면이 나온다던가, 여성의 상의탈의이상의 노출  등 이러한 것 말이다. 후레자식도 이러한 표현은 모두 피하고 있다.

그러나, 성적 상상력이나 폭력적 표현의 범위는 사실 이러한 직접적인 장면보다는 연출과 스토리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 때문에 이는 심의기관에서 적절한 수준에서 컨트롤 하고, 법보다 더 넓은 범위로 제제를 하는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웹툰의 경우, 만화라는 특성 상 더욱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효과 또한 가지고 있다. 실사보다는 그림이, 그림보다는 글만 있을때  표현력은 약해진다. 따라서, 웹툰은 실사, 곧 영상물보다는 그 표현의 범위에서 더 넓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상상력은 그 공백을 실사보다 더 강하게 채워넣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이는 칼로 자르기보다는 전문적인 지식을 혹은 해당 문화업계에서 적절히 스스로 조절하는것이 옳다.

3) 웹툰은 문화콘텐츠

그러한 와중에 스릴러 웹툰(후레자식)의 중앙사전검열 논란은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고, 대한민국 문화산업 전체의 위축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이슈이다. 아마 고소자는 이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것 같아 잘 몰랐겟지만,  십수년동안 이를 자율규제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문화계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사실 많은 이들이 자율규제의 의미 또한 잘 모른다는데에서 놀랐다. 자율규제는 중앙규제가 사라진것이 아니다. 고소자는 고소가 아닌, 중앙규제처에 진정을 넣었어야 햇는데, 중앙규제처를 고소했다. 이는 현 자율규제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과거 독재시대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다.

2.  폭력 웹툰은 정말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들까?

후레자식 고소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폭력적인 장면”이 아이들에게 위해하다였다. 그리고, 결론은 아이를 폭력적으로 만들수 있다. 라는 것인데, 일부는 동의하고 나는 일부(사실 대부분)는 동의하지 않는다.

1) 아이들의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폭력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보자. 종이와 같이 깨끗한 아이들은 폭력을 쓰지 않을것인가? 성선설과 성악설 이야기까지 갈수도 있지만, 애키워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아니다.” 아이들은 원래 순수하게 폭력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본능적이다라는 것이 옳다. 폭력에 대해서 수위조절이 일반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 아픔에 대한 학습이 없고, 상대방에 대한 공감에 대한 학습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 대한 거부감은 존재한다. 이는 학습되는 것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오랜 진화과정 중에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부터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부분이 망가진(정확히 말하면 없거나 약한, 질병으로 보기에는 어려운면도 존재한다.) 사람은 싸이코패스로 칭할 수 있다. 실제로 후레자식의 주인공이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해당 부분일 수 있다. (웹툰에서는 스스로 해당 기억을 봉인했다. 그리고, 주제에 대한 가장 큰 반전 중 하나)   아이들의 폭력에 브레이크를 거는 가장 큰 요인중에 하나일것이다. 그리고, 지난 포스팅에서 어느 정신과의사분께서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라고 지칭한 외부의 자극이 덜한 성장과정을 거친 분들은 해당부분의 효과가 클것이라는데 동의한다..

또한 폭력의 감수성은 어린이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공포, 재난, 스릴러 장르에 약한 이들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솔직히 본인의 경우에도 어릴때 본, 로보캅1의 총상에 대한 기억이 깊이 머리에 남아 한동안 너무 무서웠다. 해당부분은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므로 본인도 어린이는 부모의 관찰하에 미디어나 컴퓨터를 쓰도록 권한다. 이건 아이의 상태에 따라 다른것 이라 칼로 잘라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폭력에 대한 감각적 거부감만이 폭력을 방지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폭력은 물리적인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적인 형태나 간접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이를 소재로한 웹툰도 많다.

2) 폭력에 대한 무감각성이 폭력을 강화할까?

더군다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자극을 통해 약화된다.

이러한 피에 가장 무감각한 직업은  군인, 소방관, 경찰관, 의사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피를 봄으로 통해 이에 대한 본능을 억누르고, 이것은 나의 안전과 상관없다는 것을 학습한다. 이는 본인의 폭력의 강화와는 무관하다.

아이들은 어릴때 주사를 보고 무섭다고 느끼지만, 클 수록 괜찮고, 아이때는 엄마 한테 한대 맞는것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만, 군대가서 빠따를 맞아도. .아이 씨발.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학습의 결과다. 결론 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성장은 매우 정상이며, 폭력에 대한 무감각은 성장함에 따라 피할 수 없다.

결국 폭력의 감수성 정도가 폭력을 행하는데에 직접적인 제어장치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성장기에 대한 폭력억제는 폭력의 부조리함의 이해

그러면 폭력의 기재를 억누를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공감과 사회성이다. 피해자로서 느끼는 1차적인 아픔이 아니라, 바로 폭력의 부조리함에 대한 학습이다. 폭력으로 인한 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회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학습이전에 법으로 막아두고는 있지만, 법으로만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앞서말한 싸이코패스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분들이 기준이 될수는 없으니 그냥 보통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자.

때문에 방송통신윤리 위원회의  공감능력이 존재하는 보통사람을 위한 폭력에 대한 규제는 “폭력을 찬양”하는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다. “폭력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후레자식은 단연코 폭력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말한 폭력의 부조리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4) 웹툰 미디어의 10대와 대중 공감의 우수성

앞서 말한 웹툰의 특성은 10대에게 폭력의 부조리함을 이해시키는데 효과적인 미디어다. 제작 비용이 싸서 진입장벽이 낮으며, 심지어는 직접 생산이 가능한 구조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높은 자유도와 낮은 진입장벽을 선사했다. 결과적으로 매우 어린작가들의 등단이 가능한 구조며(실제 고등학생 작가도 있다.) 10대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그들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이해한다.  또한 다양한 사상과 생각, 상상력을 버무리고, 경쟁을 통해 문학적, 대중적 요소가 높은 것들이 상위로 올라오는 구조이다.

때문에 폭력에 대한 굉장히 실증적이고 다양한 해석들을 해준다.

난 오히려 사전검열을 강하게 거치는 깨끗한 방송에서 정말 십대들을 위한 솔직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가? 라고 묻고 싶다.  학생사회의 1진에 대해 성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저 학교폭력을 당하면 신고해라. 가 다 이지 않나?  선생님들의 교권이나 땅에 떨어진 상황이나 아이들의 학업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들의 꿈에 대해 어떤 미디어가 이야기를 해주고 있나.

웹툰에서 1진물의 위해성은 여전히 논란의 거리이긴 하다. 웹툰에서 상상하는 멋진 1진은 사실 “나라면 다르겠지”라고 느끼는 피해자들이 그린 상상속의 1진의 모습이기 떄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은 성인들의 내가 재벌총수가 되면.. 과 다를바가 없다.  성장기 아이들 사회에서 폭력도 하나의 계급이기 때문이고, 이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앞서 말한 폭력의 사회적 부조리함을 더욱 가르쳐야 한다. 적어도 웹툰의 1진물들은 “폭력 찬양”은 19금에 걸리기 때문에, 작가의 실력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폭력을 찬양하는 작품은 없다.

오히려 성인이 된 1진이 학창시절에 무심코 했던 폭력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소재도 정면으로 그린 작품들도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방송에서 외면한 학교 폭력에 대한 진짜 심각한 논의는 웹툰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어른들의 미디어에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벌줄지와 격리할지만 고민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생산,소비자가 모두 10대가 아니니..

요즘에는 그 범위를 넓혀 최근에는 가족간의 폭력까지 소재의 범위를 넓혔다. 그런 웹툰을 보고 펑펑 울었다는 댓글이 달리는 요즘이다. 과연 우리의 미디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일까? 이런 웹툰을 다시 중앙 규제로 회귀하자는 말인가?

3. 사회를 비추고 사회를 치유하는 웹툰

그제 영화 곡성을 보았다. 이 영화도 15금이 아닌 부모의 지도하라면 15세 이하도 시청가능한 15가다. 솔직히 말해 후레자식보다 훨씬 잔인했고, 후레자식보다 혼란스럽게 떡밥을 늘어놓았다. 이 영화도 19금 논란이 좀 있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지 않다. 이는 꽤 수준 높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중간에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후레자식처럼 고소자처럼 몇편만보고 이거 19금걸어야 되. 이러지는 않는다는것이다. 잔인한 표현이 많았지만, 끝나고 나면 피에 대한 기억보다는 스토리와 떡밥만 떠올랐다. 이것이 연출과 스토리의 힘일것이다.  사실, 몇개의 웹툰이 떠오르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비용의 영화에서 저정도의 감독의 자유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다는 점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계가 성숙한 증거일것 같다.

오늘날의 웹툰은 사회를 비추고, 사회를 치유하고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 어릴적 불량만화방에 대한 기억만 있는 분들이 웹툰에 대해 심각한 오해가 있는듯하다. 일본의 Anime나 망가와 달리 한국의 웹툰은 사회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일본의 영화계가 한국의 영화계를 부러워하는 일이 만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모든 웹툰이 좋다는건 아니다. 포털의 연재물이 아닌 자유기고가 가능한 커뮤니티의 웹툰들은 아이들의 욕망만을 여과없이 뱉어내는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스스로 걸러내지 못할만큼 우리의 문화계와 사용자들과 독자들이 무식쟁이들은 아니라고 본다. 이를 역행하지는 말자.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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