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에세이 (2)] 메디슨 창업하다

“차라리 창업해 말어먹어 볼까” 의기투합
카이스트 시절 후원기업 설득 실패… 참담한 경험
남에게 ‘좋은 사업’ 설명만 말고 “직접 해 보자” 결심
세상 물정 모르던 젊은이들 첫 벤처에 뛰어들어

1985년 4월 카이스트 초음파 연구실에는 경사가 났다. 지도교수인 박송배 교수가 1년간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가면서 선임 박사과정인 내게 연구실 운영을 맡긴 것이었다. 그동안 호랑이 같은 지도교수의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학창 생활을 구가할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T.S. 엘리엇의 시와 같이 잔인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초음파 진단기 연구프로젝트의 후원기업인 남북의료기기에서 사업철수 의사를 표명하여 초음파 프로젝트가 좌초 위기에 부딪힌 것이다. 연구실의 프로젝트가 사라지면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보조금이 사라지는 비극이 초래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음파 진단기 프로젝트의 새로운 후원기업을 찾는 역할을 선임 박사과정인 필자가 어쩔 수 없이 떠 맡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전선 근무 시절 연구개발에서 생산 영업 기획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은(?)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터이니, 여러분들은 연구에 전념하라”는 희망을 주고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다. 대한전선의 경험을 바탕으로 멋있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까지는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많은 기업들과 어렵게 약속을 잡고 방문하여 사업을 설명하면 모두들 좋은 사업이고 좋은 기술이라는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나 경쟁기업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경쟁기업은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유럽의 지멘스, 필립스 입니다” 하는 순간 프로젝트 후원은 물 건너 가고 있었다. 결국 과거 본인의 역량을 인정했던 대한전선의 설원량 회장을 포함한 모든 기업인들 중 한 명도 설득에 성공하지 못하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를 쳐다 보고 있을 석박사 과정 학생들, 남북의료기 파견 연구원들의 얼굴을 떠 올리는 순간 나의 설득력의 한계에 대하여 자괴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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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 진단기 프로젝트 후원기업을 찾아 헤매던 1985년5월불현듯 '왜나스스로 사업을 해볼 생각을 하지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게 메디슨이다. 사진은 창업 초기 직원들과 제품 기술을 검토하던 모습.
결국 한 달이 지나도록 돌파구가 열리지 않아 모두들 초초해 하는 5월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남들에게 좋은 사업이라고 설명하면서, 왜 스스로 사업을 하지 않는가?’라고. 창업을 떠올린 순간 쏜살같이 연구실로 달려가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파견 연구원들을 소집하였다. 모두들 후원기업을 섭외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대에 부풀어 모인 자리에서 우리가 스스로 창업을 해보자는 기상천외의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형님! 젊은 나이에 회사 한번 말아 먹어 보면 재미 있겠네요.” 이렇게 장난같이 7명의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 벤처의 효시인 메디슨을 창업하게 된 것이었다. 우선 미국에 있던 박송배 교수에게 의견을 올린 바 적극적 반대가 없는 것을 찬성으로 억지로 해석하고 창업 준비에 본격 돌입하게 되었다.

아내와 부모님 모두들 당연히 적극적인 반대를 하였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카리스마(?) 혹은 옹고집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당시 카이스트 박사과정 학생의 신분이었으나, 마침 졸업에 필요한 세계 학회논문 게재가 몇 편 확정되어 학업의 부담이 없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여겨진다.

우선 대한전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의 양대 요소인 시장과 핵심역량에 대한 분석을 해보았다. 초음파 진단기 시장은 10억달러의 시장규모로 연간 20% 성장하고 경쟁사가 많지 않은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기술의 장벽은 대단히 높았으나, 필자의 논문 주제들이었던 디지털 초음파기술, 연속 집속 기술, 획기적인 디스플레이 기술 등을 상용화하면 충분한 기술적 비교우위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모두들 꿈이 부풀어 창업 준비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업에는 당연히 자금이 필요하다. 우선 대치동에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이 아파트를 장만한 쌈짓돈은 필자가 대학 1학년 시절 장안에 날렸던 과외 선생으로 100여 명을 가르친 수입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당시 바이올린 과외 수입으로 국비 박사과정인 본인의 호구지책을 해결하던 아내의 걱정은 태산보다 커졌다. 그래도 앞으로 전진 이외의 선택은 없었다.

공장은 경기도 안성공단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의 2층 한구석을 빌렸다. 사무실은 강남구 논현동 경복빌딩의 한 귀퉁이를 얻었다. 회사 이름도 메디슨(MEDISON)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작명을 하고는 모두들 좋아하였다. ‘MEDIcal(의료용) + SONics(초음파)’라는 원래의 작명 방정식에 ‘MEDical + SON’, ‘Medical + EDISON’ 등의 해석도 덧붙이고는 더욱 좋아하였다. 회사 로고도 초음파가 퍼지는 모양으로 만들고는 창의 책임 조화라는 사훈의 의미도 부여하고 기뻐하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엔지니어 7인에 법학을 전공한 김시우군(전 하이닉스 전무)과 회계를 전공한 김종황군(벤처 창업전문가)이 가세하여 드디어 1985년 7월2일 장맛비 속에서 고사를 올리고 메디슨을 창업하게 된 것이었다.

글 : 이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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