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Talk, 아니 김범수 의장의 History (1/3)

#0. 카카오도… 벤처가 맞나?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카카오톡의 창업자는 ‘한게임’ 의 창업자 김범수 의장이다.

네이버와 함께 NHN 의 양대산맥인 ‘한게임’

최초 유료화 성공 게임회사이자, 3,0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rankey.com 기준 국내 1위 게임포털 ‘한게임’

그런 그가 다시 한번 만든 서비스가 ‘카카오톡’ 이다.

‘특수한 신규 산업에 도전하는 연구개발형 신규기업’ 이라는 ‘벤처’ 의 정의에는 맞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갓 졸업한 따끈따끈한 대학생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성공한 ‘벤처 이미지’ 와는 거리가 있는 회사다.

이유가 어찌됐든,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HOT 한 회사!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러 온 오바마도 언급했다는 그 회사!

윈도우에서 안드로이드를 돌리는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기사 제목을 “윈도PC로 카카오톡 돌린다‎” 로 쓰게 만든 그 회사!

누군가의 미래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과거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각 상황에서 경영진의 의사결정 능력’ 을 보는데 있다. 그렇기에 카카오톡을 서비스하는 카카오 회사의 과거보다는 김범수 의장의 과거를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흥신소 버젼으로 한번 살펴보자.


#1. 어렸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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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의장은 무척이나 가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차여차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들어갔고,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나도 대학교 때 신나게 놀아서 학점이 바닥을 치는 바람에 졸업하고 애좀 먹었지만, 나같은 범인과 비교할 수 있나?


#2. 삼성SDS – 유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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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히 삼성SDS 공채에 현 NHN 이사장인 이해진 의장과 동기로 입사한 김범수 의장은 94년, ‘유니텔’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PC통신관련 대학원 논문까지 썼던 그는 기술개발은 물론 기획, 설계, 유통까지 유니텔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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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텔’ 은 당시 PC통신을 주름잡던 ‘천리안’, ‘하이텔’ 이 모두 text 위주였다는 것과는 달리, 미국 AOL 처럼 모든 서비스를 클릭만으로 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비유하자면 Dos 시절에서 Windows 시대로 넘어가는 형태였던 것이다.

96년 1월 런칭 한 ‘유니텔’ 은 김범수 의장이 퇴사하는 98년, ‘하이텔’ 을 제치고 부동의 1위 ‘천리안’ 을 따라잡아가고 있었다.


#3. 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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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김범수 의장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함께 불현듯 사표를 던지고 창업에 나선다.

개발대행으로 수익을 내던 김범수 의장은 97년 유니텔에서 하던 O/X 퀴즈 이벤트에 7만여명이 참가했던 것을 떠올리며, 바둑이나 장기, 고스톱 등의 온라인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커뮤니티 포털로 이름을 날리던 네띠앙 게임 등에서도 서비스를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 99년 네띠앙은 한게임과의 합병조차 거부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안타깝다. )

IMF 직후였던 당시, 자금난에 빠진 김범수 의장은 그 해결책으로 쌩뚱맞게도 PC방 창업에 나선다. 그리고 이 PC방 창업은 당시 수익을 가져다 준 것 이상으로 한게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PC방 사업이 뜨기도 전인 당시, 2억 4천만원이라는 거금으로 한양대 앞에 국내 최대규모의 PC 방을 오픈했고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그 다음이었다.

PC방을 하면서 김범수 의장은 PC방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고, PC방 사업과 함께 관리프로그램을 팔기 하면서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한다. 하지만, 99년 12월 PC방 한켠에서 개발한 한게임의 오픈과 함께 PC방 관리프로그램을 무료로 깔아주면서 한게임을 PC방 컴퓨터 초기화면으로 설정하는 조건을 제시한다. 기존 관리프로그램도 초기화면 프로모션을 실시했다.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의사결정이다.

나같은 일반인이라면 택도 없다. PC방도 잘 됐겠다, 관리프로그램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당장 배부른 돈을 더 벌면서 천천히 게임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김범수 의장은 눈에 보이는 수익을 뒤로 하고 지금까지도 PC게임의 가장 좋은 마케팅 수단으로 여겨지는 PC방 마케팅을, 그것도 무료로, 기존에 개발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면서, 최초로 실시한 것이다. 지금 바로 돈이 없는 상태에서 이 결정은 보기보다 쉬운 결정이 아니다.

PC방 초기였기에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던 PC방 관리프로그램의 무료배급은 PC방 업주의 대환영이었고, PC방 고객들로부터 시작된 입소문으로 한게임은 오픈 3개월만에 100만명 회원을 유치하게 된다.


#4.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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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게임과 PC방 프로모션을 공동으로 실시하고, 장비대여와 서비스 제공을 교환하던, 삼성SDS 입사동기 이해진 의장이 운영하던, 네이버는 특별한 수익모델이 없이 100억 투자유치로 돈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고작 20여명의 사람이 운영하던 한게임은 하루에 10만명씩 회원이 증가하며 내부적인 과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금과 인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한게임과, 한게임의 회원수와 트래픽으로 돌파구를 찾으려던 네이버와의 이해관계가 맞자, 2000년 4월 순식간에 이 둘은 합병을 발표하게 된다.

인터넷 거품붕괴에도, 2001년 3월 한게임 유료화와 6월 검색광고 유료화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합병법인 NHN 은 그 탄탄함을 과시한다.

5년이 넘게 공동대표를 하며 NHN 의 성공을 이끌던 김범수 의장은 2007년 초, 갑자기 NHN USA 대표로 발령이 나더니 8개월 만에 돌연 사표를 내고 2.35% 의 지분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후 한게임 창업멤버인 남궁원, 문태식 대표 등이 연달아 회사를 떠났다.

그 배경에는 내부갈등에서부터 NHN 의 사업비중이 검색에 쏠리거나, 바다이야기 사건이 터진 것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다음 사업인 아이위랩의 두번째 프로젝트였던 한국서비스의 시작인 2008년 6월까지 NHN 이사직을 유지했다는 점에, 불화보다는 ‘벤처’ 에 대한 김범수 의장의 그리움이 컸던 것 같다.


#5. 아이위랩 > 카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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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N USA 에 가기 전인, 2006년 12월 아이위랩을 창업한 김범수 의장은 NHN 퇴사와 함께 본격적인 경영에 뛰어들게 된다.

첫번째 프로젝트로 동영상과 사진을 공유하는 웹 2.0 블로그인 ‘부루닷컴’ 을 미국에 선보였고, ( 이왕 미국에 있었으니까.. ) 실패를 경험한다. 곧바로 2008년 6월 한국에서 네이버 지식인의 업그레이드판, 집단지성 정보추천사이트인 ‘위지아’ 를 오픈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김범수 의장은 이에 웹에서는 더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모바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2009년 2월, 스마트폰 특화 위젯을 제공하던 바이콘을 인수하고 추가로 모바일 개발자를 모집하더니 2009년 4월, 아이폰 앱 개발자 모임인 아이위런치를 시작하면서 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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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작은 2010년이었다.

PC는 정보기기이기 때문에 정보검색의 시장이 가장 크지만, 스마트폰은 통신기기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 김범수 의장은 2010년 2월부터 모바일/웹 연동 그룹형 커뮤니티 ‘카카오아지트’, 3월에는 말이 필요없는 ‘카카오톡’ 과, 3월 30일 동영상/사진 중심의 마이크로블로그 ‘카카오수다’ 까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별 3가지 서비스를 시리즈로 2달 내에 연달아 출시했다.

한국 앱스토어 소셜네트워크 부분 1위와 2위를 ‘카카오톡’ 과 ‘카카오수다’ 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다가, 그룹채팅의 강점을 가지고 있던 ‘카카오톡’ 의 성공이 점쳐지자 그것에 집중한다.

2010년 6월 카카오톡의 글로벌서비스를 시작하더니, 8월 안드로이드 앱까지 내놓았다. 무서운 속도다.


#6. 모바일 메신져 경쟁

사실 카카오톡이 모바일 메신져의 first mover 는 아니었다.

해외에는 WhatsApp 이 있었고, 국내에는 카카오톡보다도 먼저 M&Talk 이 있었다. 하지만 WhatsApp 은 유료앱이었고 한글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M&Talk 은 서비스가 원활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서 카카오톡은 무료+원활한 서비스를 넘어서, 그룹채팅을 서비스하며 사용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뉴스나 블로그 등에서는 카카오톡이 1차 모바일 메신져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를 디자인, 타게팅, 네이밍 등 여러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룹채팅’ 이라고 생각한다. 네이트온 시절부터 1:1 대화 뿐만 아니라 그룹대화에 익숙해져 있던 대한민국 사람들 ( 해외는 잘 모르겠어요 ) 에게 그룹채팅은 완전한 Killer Point 였다.

그렇게 1차 경쟁에서 승리한 카카오톡은 가입자의 Critical Mass 를 넘기며 시장을 선점한다. 그리고 2차 모바일 메신져 경쟁이 시작된다. ( 그 사이 수다폰, 네이버폰, 올레톡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생략~ )

당시 카카오톡의 단점이 있었다면 타이핑이 불편한 스마트폰에서 밖에 할 수 없다는 점과 사용자가 급격히 늘면서 느려진 메세지 전송속도, 그리고 해외 진출의 부진이었다. 그리고 이 각 단점을 공략한 경쟁자들이 등장한다.

스마트폰의 한계를 극복한 단점은 ‘다음’ 의 ‘마이피플’ 이 PC 버젼과 연계한 서비스를 선보인다. 게다가 카카오톡에서 제공하지 않는 인터넷 통화기능(mVoIP)까지 추가하고, 소녀시대를 앞세운 대대적인 마케팅을 하며, 2012년 3월 현재, 1,800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대학생 벤처 틱톡은 카카오톡의 최대 약점인 서비스 딜레이 문제를 데이터 압축기술로 해결하면서 마케팅 비용없이 빠르게 가입자를 늘려나가 출시 5개월만에 1,000만명의 다운로드를 넘어서면서 새로운 Player 로 떠올랐다. 이에 카카오톡도 황소프로젝트를 통해 서비스 속도를 개선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2012년 3월 현재, 틱톡은 1,300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해외를 타겟으로 한 ‘네이버’ 의 ‘라인’은 일본을 중심으로(40%) 해외 16개국에서 앱스토어 무료어플 1위를 차지하며 사용자를 늘려가고 있다. 국내에 출시했던 ‘네이버톡’ 이 부진하자, 이해진 의장은 바로 해외로 눈을 돌려 직접 챙기면서 성과를 낸 것이다. 역시.. 국내서비스는 현재 ‘네이버톡’ 과 통합된 상태이다. ( 2012년 3월 현재, 다운로드 2,100만을 돌파했다고 하지만, 다운로드 수와 사용자수는 별개이다. 4,200만의 사용자를 가진 카카오톡의 다운로드 수는 그 두배인 8,400만 정도니까.. 그렇다고 단순히 1/2 한 수치보다는 많을 것이다. 카카오톡은 아무래도 IT 에 있어서 교체와 재구매가 활발한 국내 기준이고, 라인은 해외 사용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

일본은 문자메세지가 이미 무료일 뿐만 아니라 이메일을 많이 사용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그 성공에 있어서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글로벌을 꿈꾸는 카카오톡에게 마이피플이나 틱톡보다는 라인이 더 강력한 경쟁상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내는 이미 모든 사용자들이 ‘카카오톡’ 의 네트워크 안에 묶여있어, 이를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심한 경쟁 속에서도 카카오톡은 2위업체인 마이피플의 2배가 넘는 4,200만명이라는 가입자를 보유하며 모바일 메신져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두차례 투자를 받더니, 기프티쇼/콘 을 비롯해, 플러스 친구, 이모니콘 판매 등 새로운 수익모델을 지속 개발하고 있다.

2012년 카카오의 또다른 시리즈로 ‘카카오 스토리’ 를 출시하고 마케팅 없이 3일만에 500만, 일주일만에 1,000만 가입의 전무후무한 흥행을 거두고 있다.


#7. 과거 성공요소

IT 는 다른 산업과 어느 정도 다른 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초기 성공’ 의 가능성이 낮고, 어느 정도는 운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IT경영인에게 필요한 것은 ‘초기 성공’ 을 이루기 위한 ‘유연함’ 과 ‘초기 성공’ 을 이룬 후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한 ‘집중’ 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결정들의 ‘신속함’ 이다.

속된 말로, 그냥 이곳 저곳 찔러보다가, 잘 익었다 싶으면 냅다 따서 먹어야 되는 것이다. 안 익은 곳에 계속 찔러도 안되고, 빨리 다른 쪽을 찔러봐야 하며, 잘 익었는데 바로 따먹지 않아도 금방 뒤따라오는 사람들한테 뺏겨버린다.

이러한 점에서 김범수 의장은 이러한 성공요소를 잘 이해하고,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한게임 시절에는 PC방, PC방 관리프로그램, 온라인 게임 등의 사업을 찔러보다가 온라인 게임에 빠르게 집중을 하여 성장시키고, 과부화가 일어나자 빠르게 가능한 합병을 진행시켰다.

카카오 시절에는 웹2.0블로그, 업그레이드 지식인을 찔러보다가 안되자, 바로 모바일로 눈을 돌려 커뮤니케이션 방법 별로 유무선 커뮤니티, 모바일 블로그, 모바일 채팅을 시리즈로 만들어 찔러봤고, 그 중 가장 성과가 좋았던 모바일 채팅인 카카오톡에 집중하여 성공시켰다. 특히 카카오부터 이후 업무 프로세스들은 ’4명이 2달내 만든다’ 라는 원칙과 함께 ‘신속함’ 에 더더욱 집중하였다.

물론 이에 앞서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결단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 관련 포스트 : 카카오

글 : 디피
출처 : http://www.dongpyo.com/blog/?p=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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