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과하이드] 하이드편 :: 애매하게 남의 일에 엮이지 말자

애매하게 남의 일에 엮이지 말자

동물 같은 감각이나 몸소 겪어 얻은 경험이 없더라도 낌새가 이상하다든가 뭔가 켕길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뭐지?’ 하고 조금쯤은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뭐지?’의 상태라는 것은 말하자면 위기를 감지하는 미묘한 직감 같은 것이다. 눈치가 없거나 둔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찜찜한 부탁이나 난데없는 지시를 받을 때면 누구나 ‘뭔가 이상한데?’ 하고 갸웃하게 되지 않는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뭐랄까 약간의 꼼꼼함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나는 지금 ‘남의 일에 어정쩡하게 엮이지 않는 법’에 대해 얘길 하려는 중이다.

소문난 오차장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책임질 일 안 하기로 소문난 오차장이라는 인접부서의 상급자가 있었다. 자신이 꺼냈던 말이 문제가 되면 서류나 문자 등의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나의 업무 관련성은 별로 없었다. 영어권 국가에서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의 접객, 통역 관계로 일 년에 서너 차례 미팅을 갖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 그가 내 책상으로 직접 찾아와 잠깐 보자고 할 때 이미 나의 위기감지 신호는 ‘당하지마, 당하지마’라고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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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꼬꼬마는 아니지

윗사람이 보자고 한다고 해서 곧장 반응하는 꼬꼬마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나는 “지금요?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라고 했다. 그렇지만 오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야. 잠깐이면 돼”하면서 활짝 웃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면 아예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먼저 가 계십시오. 하던 일만 잠깐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라고 대답하고 잠깐의 시간을 벌고자 했다. 노하우라면 노하우인데 직장생활에서 예상하지 못한 부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간격을 두는 것이 좋다.

오차장은 도서실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휴게실에서 보자고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할 말이 있다는 것이고, 건물 1층의 커피숍에서 보자고 하지 않았으니 시간이 촉박한 부탁이거나 업무상 단순 확인절차를 거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3분 정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도서실로 갔다. 오차장은 십여 페이지 정도 되는 출력물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 협력업체로부터 온 이메일과 그에 대한 회사측의 답장, 그리고 해당 업무의 진척상태를 상부에 요약한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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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장의 용건

용건인즉슨 이랬다. 우리 회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해외 협력업체가 주관하는 국제세미나에 꾸준히 참가해왔다. 세미나 자체의 질도 좋았지만, 부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상당히 좋은 호응을 얻고 있는 연례사업이었다. 연회비를 내는 대신 부장급 이상 간부에게는 세미나 참석기간 동안의 체재비가 지원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문제가 발생했다. 국제세미나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우리가 보낸 연회비를 전액 반송했다는 것이다. 연회비는 약 900달러 정도였는데 환율이 수시로 바뀌다 보니 얼마 되진 않았지만 몇 년 정도 부족액이 발생했고 그것이 처리되지 않은 채 미납금으로 남아 지금까지 누적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업무의 담당자는 오차장의 전임자인 정차장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정차장이 취한 조치는 매년 다음 년도에 미납금을 내겠다고 해당 세미나 담당 부서에 구두 약속을 한 것뿐이었다. 해외 협력업체는 T/F를 만들어 세미나를 개최했고 그 후엔 관계자들이 모두 자기 업무로 복귀했기 때문에 정차장의 구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도 그것을 추적하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4년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재작년에 정차장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자 오차장이 해당 업무를 인수했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5년 동안 누적된 미납금의 문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해외 협력업체의 국제세미나 담당자가 강수를 두었던 것 같다. 연말까지 미납금을 모두 내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차장은 현재 이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어 보고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나는 설명을 일단 끊었다.

여러분, 여기에서 자초지종을 더 들으면 ‘엮이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렇게 수 싸움은 시작되고

그렇다고 윗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그만 들을래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럴 때는 ‘잠시만요. 제가 맞게 들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차여차 했다는 거지요?’ 라고 한 번 체크포인트를 만들자. 그러고도 더 설명하려고 하면 ‘아닙니다. 됐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가능한 한 가장 공손한 태도로 결론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좋다.

물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오차장은 이 일에 나를 엮은 다음 업무처리를 떠넘기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시도’ 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여기서 물러서면 엮인단 말입니다.

나는 다시 ‘아,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오차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야. 들어봐. 더 있다니까’라고 했다. 절대, 절대 더 들어선 안 된다. 최악의 경우 문제가 커졌을 때 오차장이 ‘저는 000 과장에게 다 설명하고 인계했습니다. 000 과장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라며 발을 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직감을 믿고 재차 오차장의 설명을 잘랐다. 그리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오차장님께 더 물어보겠다, 지금은 나도 하던 일이 있으니 용건이 무엇인지부터 말해달라’고 진지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오차장은 본론을 꺼냈다.

Clown businessman isolated on white

과연 본심을 꺼낸 것일까?

“내가 000 과장에게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야. 내가 영어가 약하잖아. 그래서 이 이메일 번역만 좀 해줬으면 해서 그래. 내가 지금 오후에 바로 출장을 가야 하는데 000 과장은 영어 잘하니까 이런 건 뭐 바로바로 할 수 있잖아. 좀 도와줘. 내가 나중에 한턱낼게, 응?”

이메일 영어번역을 해달라고 사람을 불러서 부서 내부의 일에 대한 전후 사정을 이렇게나 자세히 설명하다니 당연히 뭔가 이상하다. 오차장 부서에 외국에서 대학 나온 사람이 몇이고 직속부하가 몇 명인데…

여러분, 이 부분에서의 대처가 또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섣불리 ‘다른 일이 있어서 못 한다’든가, ‘그쪽 부서의 영어 잘하는 직원에게 시키면 되지 않느냐’하고 말을 꺼내선 안 된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간 더 윗선, 이를테면 그쪽 부장을 통해 우리 부장에게 부탁이 들어올 수 있다. 또 오차장 같은 성격에 ‘그래? 알았어. 그럼 이거 정식으로 업무협조 넣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하고 휙 돌아서서 공문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예 정식으로 내 업무가 된다. 나는 그런 불쾌한 경험을 이미 몇 차례 해보았기 때문에, 더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한껏 웃으며 ‘네, 알겠습니다~~’ 라고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오차장은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오늘 중으로 이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자신은 오후에 출장이 잡혀 있으니 번역한 이메일을 세미나단체에 직접 보내달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뭔가 냄새가 나지 않나요?

여러분, 이 단계에서 또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직장생활에서의 직감

꼬꼬마 직장인들은 통상 이쯤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용을 검토도 안 하고 보낼 순 없지 않나요? 영어로 이메일 작성 후에 오차장님이 한 번 검토하고 나서 보내야죠’라고 말이다. 여러분,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오차장이 이렇게 말하죠. ‘그럼,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오후에 출장이니까 000과장이 우리 부장님께 직접 검토를 받아줘. 알겠지? 땡큐~~’.. 단단히 한 방 먹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토를 달지 않고, 알겠다, 해당 이메일을 영어로 번역하겠다, 출장 잘 다녀오시라고 말한 뒤 프린트물을 넘겨받아 바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오차장이 한글로 작성해놓은 이메일을 영어로 번역했다. 단 한 글자도 더하고 빼는 것 없이 그대로 직역했다. 오차장의 한글본 자체가 어색한 부분이 많았지만 나는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받았던 프린트물을 오차장의 책상 위, 컴퓨터 자판기 위에 되돌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자리에 돌아와 내 할 일을 조금 했다. 영어로 작성한 이메일은 퇴근 시간이 30분 정도 지난 시점에 오차장의 이메일 계정으로 보냈다.

‘오차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해당 이메일을 영어로 영작했습니다. 회사의 공적인 업무이기 때문에 단어나 문장선택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인 업무담당자인 차장님 보시기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한 번 검토해보십시오. 그리고 확인이 끝나면 직접 보내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업무담당자이시고 상대편 업무담당자에게 간단히 인사라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참고하라고 주신 프린트물은 차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전 예정된 미팅이 있어서 퇴근합니다. 수고하십시오. 이만 줄이겠습니다.’

A stressed out businessman

이제부터가 마무리 수순

이메일을 보낸 후에는 이메일을 보냈으니 검토해달라는 내용의 간단한 문자메세지와 카톡을 보냈다. 오차장에게 전화를 한 후 전화벨이 한 번 울렸을 때 끊었다. 그리고 퇴근을 했다. 용건이 있다면 나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나는 세 번 정도까지는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검토해봤는데 이상 없으니 그냥 내가 이메일을 보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퇴근하고 40분쯤 지났을까. 오차장 소속부서의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아, 바쁜데 미안해. 000과장. 혹시 우리 오차장이 무슨 말 한 거 없던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대답했다. “이메일 영작해달라는 거 말씀이시죠?” “어, 그래. 나는 내용을 잘 모르는데 그게 뭐야?” 여기서 말을 잘해야 한다. “네. 외국에 보낼 이메일이 있는데 출장가느라 시간이 없다고 부탁을 해서 영작을 했고요. 오차장에게 다시 회신했습니다. 참고자료는 오차장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놨고, 오차장이 곧 내용 검토해서 그쪽으로 이메일을 보낼 겁니다.” 부장은 “그래?” 하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래, 알았네. 수고해”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직장이라는 곳이 무슨 속고 속이는 도박판이나 복마전이 펼쳐지는 드라마의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지나 위기에 처하면 그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비겁함과 나약함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니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각오는 좋은데, 그런 부류들에 당하고 살아서야 힘들게 직장에 들어간 보람이 없다. 좋은 게 좋다고 80년대 계몽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예스맨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상대의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하는 싸가지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핵심은 내가 할 일, 해줄 일이면 도와주면서도 불필요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질 필요 없는 책임을 지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후일담

후일담을 간단히 줄이자면 해당 부서의 관련자들은 깡그리 문책을 받았다. 국제세미나는 없어졌다. 나중에 일을 도와주어서 고맙다며 오차장이 밥을 먹자고 했지만 두 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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