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노키아의 쇠락, 그리고 대인(?)의 선택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소프트웨어 프로덕트 라인(Software Product Line)이라는 게 있습니다. 줄여서 SPL이라고 부르죠. SPL은 제조업 분야에 제품 리인업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제품 라인업은 제품을 개발할 때 저가 제품부터 고가 제품까지 일렬로 세워 놓고(실제로 일렬로 세우지는 않죠. 개념상입니다 ^^) 공통으로 들어가는 부품을 개발하고 이것들을 넣거나 빼면서 제품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제품 라인업의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가 있습니다. 플랫폼이라는 게 있어서, 예를 들면 국내에서 생산되는 소나타와 K5는 중형차 플랫폼을 같이 쓰고, 디자인을 차별화해서 제품을 만듭니다. 엔진 같은 것은 플랫폼과 상관없이 여러 차종에 걸쳐서 두루두루 사용하고요.

공용화 전략에 바탕을 둔 제품 라인업은 다양한 제품을 제조하는 경우 상당히 효과적인 접근방법입니다. 여러 제품을 싼 가격에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 SPL도 제품 라인업처럼 상당히 괜찮은 접근방법이죠. 즉 소프트웨어의 기초 부품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넣고 빼면서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때문에, 기초 부품만 잘 만들고 쉽고 빠르게 조립할 수 있게 한다면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상당히 효율적입니다. 물론 말은 쉬운데 구현은 쉽지 않습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조직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이 SPL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고객들에게 많이 이야기했죠. SPL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노키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키아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여러 성공 요인이 있었지만 SPL이 주요한 성공 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노키아가 휴대폰 제국의 황제로 굴림할 당시, 노키아는 일년에 25~30개의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모델 개수가 이렇고 여기에 전세계적으로 핸드폰이 출시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개발해야 하는 소프트웨어의 양이 엄청나죠. 따라서 다양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노키아 입장에서 SPL은 꼭 필요했습니다. 소프트웨어 기본 재료를 만들어 놓고 이것을 조립해서 사용한다는 전략이 없다면 다출시 모델 전략은 실현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개발자를 많이 고용한다면 가능하기도 했으나 이익이 급격히 감소하겠죠.

한때 전세계를 지배했던 노키아가 이제 그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외국인 CEO를 영입했고 이 CEO가 한때 캐쉬 카우의 근본이던 플랫폼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심지어 자사의 핵심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 SPL의 핵심인 심비안을 버리고 윈도 기반의 핸드폰을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노키아가 황금기를 누릴 당시만 해도 노키아의 운명이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노키아의 전략을 상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했죠. 즉 다양한 계층의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는 다모델이 필요하고 이런 것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SPL같은 역량이 핵심이라고요. 하지만 아이폰은 이런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하드웨어, 기구, 소프트웨어의 완벽한 통합, 제품과 서비스를 이어주는 완벽한 생태계를 구축함으로써 게임의 룰을 바꾸어 버렸죠. 결국 이런 바뀐 환경에서, 노키아의 독점적 위치를 유지해 준 SPL이란 자산은 이제 발전을 가로막는 덫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노키아 내부에서도 아이폰과 같은 제품을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변혁을 기회를 놓쳐 버리고 나자, 간단한 다이어트로 회복할 것을 빼와 살을 깎는 대수술이 아니면 회복 불능한 사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변화의 바이블 주역을 읽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이 정말 꼬일 때가 있습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있죠. 운발이라는 게 있다면, 운이 바닥나거나 운이 꽉 막혀서 일이 되지 않는 경우죠. 백약이 무효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대인과 소인의 처세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인들은 운이 막힌 상태에서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하죠. 즉 운이 막힌 상황을 정면돌파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만족하면서 해결책을 찾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인은 다르다고 합니다. 운이 막힌 상태에서 정공법을 취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놓고 거꾸로 쓰러진 운의 방향을 상승 국면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운도 막히고 되는 게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내놓으니 참 인생이 고달프겠죠. 하지만 운을 바꿀려고 하는 이런 시도가 결국 막힌 운을 뚫는다고 합니다. 참, 감동적인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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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http://www.flickr.com/photos/12927403@N00/4697843594/

자, 노키아는 주역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운이 꽉 막힌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키아가 취한 일련의 선택은 소인의 선택일까요? 대인의 선택일까요? 일단 심비안을 버리고 그나마 차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 윈도를 선택한 것은 대인의 선택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적어도 노키아가 소인이었다면 심비안이라는 쪼그라드는 밥그릇에 의존하면서 생존하는 전략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노키아의 향후 움직임에 따라서 노키아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토롤라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노키아도 멋지게 다시 비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폰, 안드로이드, 윈도의 경쟁을 통해서,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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