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를 화면 구석에서 중앙으로 ‘손말티비’

“청각장애 어린이는 한해한해 지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콘텐츠를 필요로 한다. 어떤 내용으로 그 콘텐츠를 채울지에 대한 고민은 여태껏 부족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겪는 불편함만 주목하는 대신 이제는 소통과 즐거움이라는 공통의 욕망도 중심으로 가져와야 한다.” 손말티비를 운영하는 박성환 함께걷는미디어랩 대표는 말했다.

손말티비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팟캐스트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재구성하는 데서 출발, 현재는 이들을 위한 뉴스, 예능 콘텐츠를 만드는 유튜브 채널로 자리 잡고 있다. 별다른 홍보 없이 바이럴만으로 구독자 수는 2,000여 명을 확보, 오리지널 콘텐츠 ‘손가락뉴스’도 지난 8월부터 선보였다. 청인 중심 콘텐츠를 무작정 번역하거나 농인 사회 소식만을 다루는 기존 흐름에서 벗어나 흥미, 시사성, 시의성이 고루 높은 정보를 수어와 자막으로 함께 풀어내고 있다는 소개다.

채널 타겟은 청각장애인 가운데서도 10대 중반 청소년부터 성인. 이는 박 대표가 청각장애아동 성장환경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청각 장애를 갖고 태어나도 만 3살 이후 인공와우수술을 받거나 보청기를 이용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난청인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소음과 문자를 구분하는 훈련이 충분치 않았기에 이들이 정보를 완전하게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어렵다. 꾸짖거나 칭찬해도 분위기만 파악할 뿐 실제로는 정보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성장할지 모른다.”

결국 아이들은 답답함을 못 이겨 다시 수어를 배우며 농인 친구를 찾지만 또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친구와 함께 즐길 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청각장애인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보기엔 이들의 수준은 훨씬 높아졌고 예능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이들에겐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어나 자막 가운데 하나만 지원하는 기존 콘텐츠 제공 방식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충분히 내용을 이해하려면 자막과 수어는 모두 필요하다. 영어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 한글 자막을 읽되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 영어도 부분부분 듣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박 대표는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청소년 이상 청각장애인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청인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는 학습 재료 역할도 맡을 수 있다. 수어 훈련뿐 아니라 자막으로 한글 읽기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청인으로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콘텐츠를 그리기까지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촬영 단계에서는 프롬프터 활용, 출연자와 통역사 섭외하기부터 소통까지 어려움이 따랐다. “수어 전문 채널을 찾아 댓글로 무작정 사업 기획 아이디어를 알려주고 실현 가능성을 물었다. 의견을 준 이에게는 출연을 청하거나 출연자 추천도 부탁했다. 작업을 늘리다 보니 이들만의 강점도 보였다”며 박 대표는 “청각장애인은 소리를 대체할 무언가를 캐치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 표정에 예민하고 적은 정보로도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어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 느꼈다.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더 좋은 콘텐츠를 구상할 거라 본다”고 전했다.

유튜브 채널 ‘손말티비’ 화면 캡처

그렇게 새로 구상하기 시작한 콘텐츠는 비언어적 소통도 적극 활용한다. 먹방, 보드게임처럼 단순한 구성이나 규칙 아래서 출연자가 함께 즐기고 노는 게임이 대표적. 청각 장애인뿐 아니라 청인도 함께 몰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이미 파일럿 제작을 시작, 반응을 살핀 다음 정규 프로그램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밖에 청각장애인은 시각, 시각장애인은 청각과 그밖의 감각이 예민하다는 데 착안해 이들이 한 제품을 두고 각자 관점에서 평하는 ‘감각왕리뷰’ 콘텐츠도 기획했다.

청각장애인 청소년 진로고민을 덜어줄 프로그램도 구상한다. 현업에 있는 청각장애인 전문직 종사자에게 직접 전화해 음성 변조를 조건으로 연봉, 업계문화, 대인관계를 비롯한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해외는 농인 변호사협회, 세무사협회처럼 직업별로 농인 협회가 있어 얼마든 질문하거나 만날 기회가 있지만 국내는 다르다”며 박 대표는 “기존 청소년 진로 콘텐츠는 좋게 포장하고 뻔한 말만 반복하기 마련이었다. 우리 콘텐츠로는 업계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농인, 청인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은 수어 통역사 인력풀 구축과 기업 광고주 확보다. 아직은 실험 단계다 보니 본격적인 마케팅이나 홍보는 하지 않지만 제품 리뷰 콘텐츠를 만들거나 구독자가 차츰 늘면 소액 광고도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다. 매출이 생기면 정식으로 수어 통역사도 채용, 장기적으로는 청각장애 청소년을 위한 소통 창구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이들 역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고민을 털어놓을 채널은 여지껏 부족하다. 채용한 수어 통역사가 상담 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기르고 어디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길 바란다. 이들에게 건강하게 성장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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