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초기 스타트업 투자가의 고민과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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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해가 바뀌는 것이야 나이가 들어갈수록 익숙해지는 일이지만, 올해는 여러모로 특수한 해였다. 무엇보다 코로나19 판데믹이 발발하면서 스타트업 투자뿐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 더 나아가 인류의 삶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이 영향에서 누구도, 어떤 분야도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스타트업 투자도 마찬가지였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건강과 질병을 다루는 우리 헬스케어 분야는 싫든 좋든 더욱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나 우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이하, DHP)로서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올 한 해 우리는 110개 정도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초기 스타트업을 검토하고, 그중에 6건의 새로운 투자를 집행했다. (막바지 협의 중인 건이 있어서,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7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펀드를 결성하여 투자를 집행했는데, 처음으로 네이버, 퓨처플레이 등 기업 LP가 출자받은 펀드다. 또한 처음으로 구주 매각을 통해서 투자한 건의 일부 회수 사례도 만들어냈다. (해당 건은 3년 반 만에 17배라는 준수한 성과다.) 더 나아가, 조직을 정비하고 정신과 전문의 등을 새로운 파트너로 모셨으며, 성공한 선배 창업가 분들도 벤처 파트너로 모셨다. 파트너들에게는 처음으로 올해 활동에 대해 인센티브를 조금 드리기로 했다.

DHP가 지금까지 투자한 20개의 스타트업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가의 역할을 더 확장하여, 벤처투자에 뛰어든 지 이제 6년 정도가 지났다. DHP를 통해서는 20건의 투자, DHP 창업 이전에 개인적으로 진행한 엔젤투자까지 합치면 25건 정도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그 성과가 서서히 나오고 있다. 그중에는 폐업을 한 곳도 있고, 다른 분야로 피봇팅을 한 팀도 있다. 또한 성공적으로 사업을 지속하여 IPO가 결정되었거나, 상장 주간사를 선정하고 IPO 준비에 돌입한 곳들도 있다.

스타트업 투자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이 분야의 투자에 쉽게 보고 뛰어들었다가 큰 코를 다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으로 배웠다. 헬스케어 분야의 도메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 기존의 벤처캐피털이나 액셀러레이터보다 우리가 더 유망한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평가하며, 가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정도의 네임 밸류를 가지고 있으면 딜 소싱도 더 쉬울 것으로도 생각했다. 이러한 우리의 초기 가설 중에 일부는 어느 정도 타당했지만, 또 어떤 것들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벤처투자 업계에는 크게 몇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사회 초년생부터 벤처투자자로서 경력을 쌓으신 분들도 있고, 창업가 출신으로 VC로 거듭나신 분들, 혹은 대기업이나 증권사 등 다른 업종에 있다가 옮겨오신 분들, 그리고 우리 같은 의료, 헬스케어 등 기존 도메인 전문가들이 벤처투자로 뛰어든 경우다.

이런 종류에 두 가지 이상 해당되는 분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분야 자체의 역사가 짧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는 이 중 어느 하나에만 해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 바닥에서 투자자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모두가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무기를 바탕으로 더 좋은 딜을 발굴하고, 그 딜을 성사시키고, 좋은 투자 성과를 내기 위해서 경쟁이 펼쳐진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결국 헬스케어라는 특수한 분야에 대한 이해, 전문성, 그리고 네트워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스타트업 투자는 그 자체로 아트다. 스타트업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이뤄내지 못한 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더구나 그들이 가진 자원은 불충분하고, 상황에 따라 계획은 자주 바뀌고, 창업에 대한 경험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든 스타트업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돈을 투자하면,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투자자를 설득한다. 이런 여러 스타트업들 중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 결국 스타트업 투자자의 역할이다.

‘스타트업 투자는 아트’라는 명제는 초기 투자로 갈수록 더욱 진실이 된다. 왜냐하면 초기 스타트업으로 갈수록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데이터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시리즈 A 정도가 되면, 그나마 팀도 모양새를 갖추고, 그동안 해온 것들이 있으므로 어떻게라도 평가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조금은 생기게 된다. 그동안 개발한 앱이 될 수도 있고, 그 앱으로 그동안 발생시킨 매출이나, 확보한 사용자, 혹은 이를 통해 분석할 수 있는 여러 지표들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극초기 스타트업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공동창업자를 중심으로 갓 결성된 팀과 사업계획서 정도다. 사업계획서에는 시장분석이든, 사업 아이템이나, 사업 모델 같은 것들이 적혀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종이 쪼가리 위에 쓰인 한낯 계획일 뿐이다. 이 모든 계획은 타당한지,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을 팀이 갖추고 있는지, 실행에 옮겨졌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지, 그 결과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벌어들이는 돈은 충분히 클지 등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찬 초기 창업자들은 저마다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투자금만 있으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그분들이 애당초 창업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 모두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창업자들 중에서 자신의 계획을 현실로 이뤄내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투자자들의 역할은 ‘투자금만 주어지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창업자들 중에서, 사업계획이 타당하고, 올바른 가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극소수의 분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스타트업 투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그렇게 창업자들의 확신에 찬 주장과 그들이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가 모두 설득력 있게 보였다. 지금이라면 우리 투자 검토 과정의 초반에 스크리닝 되었을 어설픈 사업계획도 당시에는 꽤 그럴듯하게 느껴져서, 투자를 진지하게 검토했던 적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소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투자자로서도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제 6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스무 건이 넘는 투자를 하고, 또 그 수의 몇 배가 넘는 회사들을 검토하고 심사하면서, 우리가 투자했던 회사들과, 우리가 투자하지 않았던 혹은 투자하지 못했던 회사들이 다수 생겨났다. 그리고 그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기업들이 결국 어떠한 성과를 보였는지, 우리가 검토했을 때 그들이 했던 계획과 약속이 얼마나 지켜지는지에 대해서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2X2의 경우가 생기게 된다. 우리가 투자했던 기업과 투자하지 않았던 기업. 그리고 사업이 잘 진행되는 기업과 잘 진행되지 않는 기업. 물론 우리가 투자한 기업의 사업이 잘 진행되는 경우가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했던 기업의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속이 쓰리다), 혹은 우리가 투자하지 않았던 기업의 사업이 잘 되는 경우 (배가 아프다)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경우에는 안타까우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약간의 안도감도 들게 된다.

특히, 여러 경우 중에우리가 투자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기업이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경우’에 가장 많이 배운다. 우리가 과거에 검토했을 당시에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혹은 그때 이후로 무엇이 바뀌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보이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떠올려보려고 한다. 비슷한 딜이 새로 들어온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투자 검토를 위한 우리의 시각도 갈수록 (바라건대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경험도 축적되기 때문에 ‘만약에 그 팀을 지금의 우리가 다시 검토한다면 이번에는 어떤 결론이 나올까’ 하는 의문을 자주 가져본다. 이런 기업들의 신규 투자 유치 소식이나, 좋은 성과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나는 우리 내부 슬랙 채널에 ‘이 회사를 우리가 왜 놓쳤을까’, ‘우리가 만약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평가한다면 결론이 다르게 나올까’ 하는 질문을 우리 파트너들에게 종종 던지곤 한다.

극초기 스타트업일수록 평가하기가 더 어렵다는 명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러면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이 스타트업이 앞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 사업계획서에 있는 계획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더 나은 계획으로 피봇팅 할 수 있을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정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변 중 하나는 결국 대표를 잘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스타트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대표자다. 특히 초기에는 스타트업 그 자체가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사업의 방향을 결정하고, 어떻게 실행시키며, 사람을 뽑고, 돈을 어떻게 벌고, 쓰고, 투자를 유치할지 결국 모든 것을 대표가 결정한다. 어느 단계의 기업이든 그렇지 않겠냐만, 아직 시스템도 없고, 구현해놓은 것도 없으며, 사람도 없는 극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는 대표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스타트업은 그 대표의 그릇만큼 성장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다음 질문은 “대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가 된다. 스타트업 평가가 결국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과연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만큼 또 어려운 것이 있을까. 그것도 아무런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 대표자가 연쇄 창업가여서 기존에 다른 창업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상당히 쉽게 흘러간다. 기존에 수행했던 과업들을 살펴볼 수도 있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평판 조회를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헬스케어 바닥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번이 첫 창업인 창업자의 경우에는 참고할 수 있는 데이터가 별로 없다. 과거에 일했던 사례들을 본다고 하더라도 창업이 아닌 경력의 경우 (예를 들어, 대기업, 병원 등의 근무 경험), 참고는 되지만 그것이 창업자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만큼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것은 특수하다. 이러한 경우 대표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항상 직면하는 문제이고, 또 (우리가 과거에 그러했듯이) 이 바닥에 처음 들어오는 벤처투자자들이 종종 과소평가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도 좋은 답은 있다. 바로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성격과 역량은 어떠한지, 철학과 가치관은 어떤지, 윤리적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투자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능력을 과장하거나, 가면을 쓰거나, 심지어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이를 대부분 검증할 수 있다.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는 시간이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투자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극초기 투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올해와 같은 유동성이 풍부한 시장 상황에서는 모든 단계의 투자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돈이 많이 풀리고, 엑셀러레이터는 더 많아지며, 벤처캐피털이 더욱 초기 투자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극초기 투자에 대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즉, 좋은 창업팀의 경우 더욱 많은 투자사들이 ‘서로 투자하려는’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표를 더 잘 평가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들이다가는 딜을 다른 투자사에게 모조리 뺏기고 만다.

여기에 초기 스타트업 투자사들이 마주하는 큰 딜레마가 있다. 좋은 딜인지 검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시간을 들이면 딜을 뺏겨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조금 더 검증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딜을 아예 놓쳐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검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이는 일종의 치킨 게임으로, 업계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업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코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투자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딜레마에 대응하고 있지만, 결국 워런 버핏의 말처럼 ‘수영장 물이 빠지고 나면, 누가 수영복을 입지 않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초기 투자사는 다른 초기 투자사, 벤처캐피털, 심지어는 정부와도 경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 있다. 바로 기업가치의 인플레이션이다. 투자사들이 ‘서로 투자하려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딜을 따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회사를 더 비싸게 쳐주고, 투자금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다. 어느 스타트업의 대표라도 자기 회사의 가치를 더 비싸게 쳐주고, 돈도 더 많이 준다면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전략은 (우리 같은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밸류애드하는 투자사보다는) 주로 큰 펀드를 바탕으로 재무적 기여를 우선시하는 규모 있는 투자사들이 즐겨 쓰는 전략이다. 이런 대형 투자사들이 극초기 펀딩 시장으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더 높은 밸류에이션에, 큰 규모의 펀딩을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와 같이 도메인 전문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투자 여력이 크지 않은 투자사의 경우에는 투자 딜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 경쟁사들에 비해 밸류에이션도, 투자금액도 더 크게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문성이 높고 네트워크가 좋다고해도, 스타트업의 대표는 기업가치를 더 높게 쳐주고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려있고, 돈으로 승부하려는 투자사들이 있는 이상 이런 현상도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될 것이다.

즉, 극초기 투자사는 실로 다방면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극초기 스타트업 자체가 원래 평가할 수 있는 데이터가 적기 때문에 아트에 가깝다. 하지만 치열해지는 투자 경쟁으로, 근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평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기업가치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더 큰 투자금을 지불해야만 하는 (즉, 더 큰 리스크를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현재 한국 시장에서 극초기 스타트업 투자의 가장 어려운 점이다.

최근 한국의 벤처투자 시장에는 극초기 투자에 뛰어드는 주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엑셀러레이터가 거의 300개에 가깝게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중견기업, 연구소, 협회, 국회의원 등 엑셀러레이터를 만드는 주체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이로서 투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고, 시장의 구조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이 이 시장의 어려움을 얼마나 알고 뛰어드는 것일지 의문과 우려를 가지고 있다. 시장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한 채 쉽게 보고 뛰어드는 경우 그들 자신도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가 더 왜곡되거나 혼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사들의 시행착오는 결국 그들에게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시행착오로 이어진다. 초기 스타트업들이 잘못된 투자사에게서 잘못된 조건으로 투자를 받아서 사업의 존폐 기로에 서는 경우를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분노가 일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시장에 난립하고 있는 초기 투자사들이 얼마나 장기적으로 지속되는지, 유의미한 투자 실적이 있는지 (예를 들어, 1년에 투자를 한 건이라도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면 시장이 정말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선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자. 과연 극초기 스타트업 투자는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인가. 특히 우리와 같은 ‘디지털 헬스케어’와 같은 특정 도메인에 버티컬로 투자하는 극초기 투자사는 어떠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스타트업 얼라이언스가 매년 주최하는 연간 행사인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 2020’에서 연자로 나서 고민을 공유한 적이 있다. 주로 엑셀러레이터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극초기 투자사라는 말로 대신해도 이 고민은 유효하다. 요약하자면 ROI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극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투입되어야 하는 자원은 아주 크지만, 반대로 그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작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비즈니스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바닥에 내가 처음 들어오면서 착각 혹은 오해했던 부분도, 그리고 지금도 이 바닥에 처음 들어오는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 부분도 이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극초기 스타트업 투자는 ROI가 나오지 않는다. 정말 일을 제대로 하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초기 스타트업에는 훨씬 큰 리소스가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우리와 같은 도메인 전문가들에게 결국 그 시간은 돈과 직결된다.

하지만 우리가 투입하는 투자금은 작게는 몇천만 원에서 커봐야 1억 원 정도이다. 그것도 대부분 우리의 돈이 아니라, 출자자들에게서 출자받은 펀드에서 나가는 돈이다. 정말 성과가 좋아서 우리가 이 돈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돈을 버는 것은 출자자들이지 운용사인 우리에게 돌아오는 인센티브는 그리 크지 않다. 운용사의 대표인 나로서는 이러한 모델을 바탕으로 우리 파트너들에게 얼마나 보상해 줄 수 있을지, 아니 보상을 해줄 수나 있을지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민은 기존의 벤처캐피털이 하는 고민과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하지만 벤처캐피털은 작아도 수억, 크게는 수십억, 수백억의 규모로 투자하기 때문에, 같은 배수로 수익을 올려도 인센티브로 돌아오는 절대 금액 자체는 훨씬 크다. 혹은 펀드에 운용보수를 같은 비율로 받더라도 실제로 운용사에게 돌아가는 금액에는 차이가 난다. 결국 사이즈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펀드의 사이즈와 개별 투자 금액의 사이즈. 결국에는 자본의 논리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자본 논리를 깨닫기 위해, 혹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인정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기존의 자본 논리에 동조하지 않고서 다른 모델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것에 실패했다고 해야겠다. 다른 대안이라면, 나와 우리 파트너들이 지금처럼 소위 몸빵을 하면서 몸으로 때우는 것, 혹은 정부 과제비를 받아가면서 연명하는 것이지만,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거나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본질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움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극초기 투자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순환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투자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투자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 본질적인 역할인 투자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투자를 잘할수록, 투자를 잘할 수 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좋은 팀을 발굴하여, 합리적인 조건에 투자하고, 그 팀들에게 밸류 애드를 충실히 하여 좋은 결과를 반복적, 지속적으로 내면, 이러한 성과가 또다시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투자를 잘하게 되면 이 바닥에서는 좋은 평판이 쌓이게 된다. 투자를 잘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투자자로서는 좋은 기업을 잘 발굴해서 후속 투자를 잘 받는다는 것일 수도 있고, 피투자사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조건으로 투자해주고, 투자한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주면서 밸류애드하는 것, 그리고 출자자의 입장에서는 높은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장기적으로는 서로 연결되게 된다.

이런 좋은 평판이 쌓이면, 더 좋은 딜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기게 된다. 특히 우리는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버티컬 영역에 포지셔닝하면서, 이 분야에서 나오는 딜은 우리를 처음 거쳐가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평판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지만 어려운 것은 처음에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는 제로베이스에서, 혹은 앞서 언급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투자를 잘할수록, 투자를 잘할 수 있다’는 선순환 구조의 톱니바퀴를 최초로 돌리는 과업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집중해왔던 일도 이 톱니바퀴를 처음 움직이는 일이었다.

2016년에는 투자를 한 건, 2017년에는 두건, 2018년에는 네 건으로 서서히 늘면서, 이후로 연간 대여섯 건의 투자를 통해서 총 스무 번의 투자를 집행하면서 이런 톱니바퀴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직 ‘투자를 잘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톱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많은 초기 투자사들이 넘지 못하는 벽을 넘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참고로 디지털 헬스케어 버티컬에서 연간 대여섯 건의 투자는 글로벌에서 순위권에 들 정도의 활발한 투자 실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투자를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무엇보다 매년 우리가 검토하는 팀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좋은 시그널이다. 우리가 검토하는 팀은 재작년 40여 건, 작년 50여 건에서 올해 110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팀들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양적인 개선뿐만 아니라, 질적 개선도 있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물론 시장 전체가 커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팀들이 다른 곳이 아닌 우리에게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버티컬 투자자로서 포지셔닝이 공고해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믿고 투자금을 맡겨주는 출자자도 늘어나고, 운용하는 펀드의 규모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 투자한 팀들의 성과도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투자 회수 사례도 생겨났다는 점 등을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고 싶다.

극초기 투자사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은 바로 사이즈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펀드의 사이즈를 키워야 하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 사업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 논리적인 귀결이다. 투입되는 리소스가 크다면,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상의 기댓값을 크게 만들 수밖에 없다. 즉, 펀드의 사이즈를 키우고, 투자의 횟수와 금액도 키워서, 돌아오는 수익의 기댓값도 키워야 한다.

특히, 이는 그동안 극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엑셀러레이팅을 해오면서 파악하게 된 기회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드 단계의 투자만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한 기업들이 시드 단계를 벗어나는 Pre-A 단계에서 큰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투자한 팀을 아주 초창기부터 지켜보기 때문에, 이 팀이 정말 될성부른 떡잎인지 아닌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판별할 수 있다. 앞서 ‘팀을 가장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표를 평가해야 하고, 대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시드 투자를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팀과 대표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즉, 시드 투자자는 자연스럽게 후속투자까지 잘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Pre-A 단계에 집중하는 투자사가 적다는 것도 또 다른 기회 요인의 하나이다. 현재 시장에는 시드 단계의 투자사와 시리즈 A에 집중하는 투자사는 많지만, Pre-A에 적극적인 곳은 아주 드물다. 특히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로 좁히면 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이 분야 자체가 특수할뿐더러,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느 팀이 보석인지를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오히려 ‘옥’으로 판별 난 기업임에도 Pre-A 단계의 보릿고개에서 자금 수혈만 있으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팀인데도, 후속 투자를 받지 못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팀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투자했던 팀들을 볼 때에도 ‘우리가 돈만 있으면 더 투자하고 싶은데, 안타깝다’는 팀들이 드물지 않았다. 즉, 우리가 투자한 팀들 중에서 유망한 팀들에 Pre-A 혹은 더 나아가 시리즈 A에 팔로 온(follow-on) 투자를 할 수 있으면, 더 낮은 리스크를 짊어지고도, 더 큰 투자 수익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투자를 받은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보릿고개에서 더 이상 고생을 할 필요도 없어지므로 일석이조다. (그렇다고 모든 포트폴리오에게 팔로 온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마일스톤을 충실하게 달성하며 성장하는 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금보다 더 큰 펀드가 필요하다. 더 큰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결국 투자 실적이다. ‘투자를 잘하면, 투자를 잘할 수 있다’는 순환논리의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꾸역꾸역 돌려온 선순환 구조의 톱니바퀴가, 더 큰 규모의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도 도움이 되고 있다. 우리의 투자 실적이 5개일 때, 10개일 때, 그리고 20개일 때,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전 펀드에서는 출자를 거부했던 출자자들이, 1-2년 뒤 우리가 더 투자를 견실하게 진행하고 좋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더 많이 확보하고 다시 찾아가자 출자를 결정했던 사례도 있었다.

지금까지 DHP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펀드를 운용해왔지만, 이제는 좀 더 규모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투자사의 대표로서 최근 내가 많이 고민하고, 시간을 쓰고 있는 부분도 우리 펀드에 출자할 수 있는 LP 즉, ‘쩐주’를 모셔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모태펀드와 같은 정책자금을 받지 않고, 민간에서 LP를 모셔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2021년에 내가 직업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이다.

만약 우리가 목표로 하는 정도로 펀드 사이즈를 키울 수 있다면, DHP가 또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큰 발판이 될 것이다. 기업 구조도 조금 더 짜임새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시는 파트너들에게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전부 짊어지고 있는 (굳이 대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적인 잡무들에 대한 부담도 조금 덜어낼 수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5년 넘게 해왔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이제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내가 결심을 내리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나가가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나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내년 이맘때에도 한 해를 돌아보며 DHP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오늘 언급한 목표를 달성하여 우리가 또다시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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