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보로 감정지능(emotional intelligence), 손을 내밀면 닿는 혁신의 길

본 기고문은 아산 기업가 정신 리뷰(Asan Entrepreneurship Review, AER) ‘소셜벤처 소보로의 브랜드 포트폴리오 전략 – 소보로’ 사례의 일부 내용을 발췌 및 재구성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례는 AER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고자의 주장이나 의견은 벤처스퀘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2년 세계 디자인 기구(World Design Organization, WDO)은 패트리샤 무어 (Patricia Moore) 박사를 세계 디자인 메달 수상자로 선정했다. 무어 박사는, 코카콜라병을 디자인한 전설적인 산업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의 사무실에서 경력을 쌓고,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 미국 항공 우주국 (NASA)에 사용되는 제품들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는 등 산업디자이너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평범한 산업디자이너였던 무어 박사를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녀가 주창한 유니버셜 디자인 (Universal Design)이였다. 유니버셜 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유년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낸 무어 박사는, 신입 디자이너 시절 근력이 약한 노인들을 위한 제품을 디자인하자는 제안을 회사에 올렸다. 사회에서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은 레이먼드 로위 같은 선구적인 디자이너들이 담당해야하는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회사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위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 (We do not design for those people)’라는 반복적인 대답이었다. 그런 사람들(those people)이라니! 자신의 사랑하는 할머니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배려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26살의 젊은 디자이너 패트리샤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제품 디자인 능력을 보유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 들이 말한 ‘그런 사람들 (those people)를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인가?

◆ 미래로 가서 얻은 지혜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준 할머니를 ‘그런 사람들로’ 치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무어 박사는 노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무어 박사가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노인으로의 ‘변신’이었다. 얼굴 분장은 물론 다양한 기계적 장치를 사용하여 청력, 근력, 시력까지 모두 노인 80세 수준의 노인으로 낮추었다 (그림 1참조). 또한 사람들이 노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느끼지 위해 유명 TV show (Saturday Night Live, SNL) 전문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얼굴과 외모까지 80세의 노인으로 변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100여개가 넘는 도시를 방문하고 다양한 생활환경을 경험하였다. 그러자 당시 26살의 패트리샤 무어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펼쳐졌다. 10분만 걸으면 도착했던 장소가 1시간 거리로 바뀌고, 많은 택시가 자신을 보고도 지나쳤으며, 버스에서 내릴 때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건물의 커다란 문은 여닫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후 돌아온 무어 박사는 노인 등 신체적으로 제약이 있는 사람들도 동등하게 편의를 누릴 수 있는 제품 디자인들을 쏟아냈다. 소리가 나는 주전자, 발판이 내려오는 버스, 안전하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주방도구 등 수많은 혁신적인 제품들이 그녀의 손에서 탄생하였으며, 이는 신체적 제약에 관련없이 모든 사용자에게 이 전에 없었던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말 그대로 나이에 관련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혜택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 패트리샤 무어와 노인으로 변장한 패트리샤 무어
출처: cordis.europa.eu

◆ 소리를 보는 통로, 소보로의 탄생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실시간 음성변환 서비스를 시작한 소셜 벤처 소보로의 윤지현 대표도 이와 같았다. 포항공과대학교 필수 과목인 ‘창의 IT설계’ 수업을 듣던 윤지현 대표는 청각장애인 이수연 작가가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웹툰 ‘나는 귀머거리다’에서 잊을 수 없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이수연 작가가 대학교 강의실에서 학생 봉사자가 실시간으로 타이핑해주는 강의노트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 문장-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듣는’ 강의에서 배제되어, 초중고 시절 내내 책상만 쳐다보며 학창시절을 보낸 수많은 청각장애학생들의 마음이 윤지현 대표의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마음에 스며든 감정은 윤지현 대표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그림 2). 학과공부만으로도 버거웠던 시절이었지만, 하루에도 몇 시간씩 시간을 내어 음성을 실시간으로 문서화할 수 있는 Speech-to-Text (STT) 기술개발에 매달렸다.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윤지현 대표는 기술적 구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STT기술 구현의 핵심은, 음성인식 기술이 강의실이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청각장애학생들이 실제로 어려움을 느끼는 미묘한 지점과 이들이 새로운 기기에 대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지 등 오히려 기술밖의 영역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그들의 되어보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윤지현 대표는 수어(手語)수업을 등록하고 농아인협회를 통해 청각장애학생과 만나서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조금씩 그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갔다.

첫 3개월 동안 청각장애인 10명을 심층 인터뷰했죠. 듣고 보니 그 당시에 청각장애인들은 초중고 때 지원이 거의 없었대요. 대부분 입모양을 보고 수업을 읽었던 것이에요. “12년 동안 책상만 보고 졸업했다”는 분도 계셨어요. 학교에 가서 책만 봤다는 것이죠. 수업은 들리지 않으니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고요. … 청각장애인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싶지 않다’고도 해요. 속기사 도우미가 붙으니까요. 일생 처음 느껴보는 지원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그 도우미는 더는 없어요. 그분들께 언제 어디서나 꺼낼 수 있는 실시간 자막을 드리고 싶었어요. 대학생 때만 잠깐 누리는 천국이 아니라, 초중고 때도, 그리고 대학 졸업한 이후에도 만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형태로요.    -소보로 윤지현 대표(AER 소보로 사례에서 발췌) –

소보로 윤지현 대표와 소보로 제품들

◆ 감정지능 (emotional intelligence), 손을 내밀면 닿는 혁신의 길

패트리샤 무어와 윤지현 대표의 공통점 무엇일까? 그 것은 바로 감정지능 (emotional intelligence)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감정지능은 단순한 감정이입 혹은 공감이 아니다. 감정에 대한 의식(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지각하는 능력), 인지(의식된 감정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 대응(인지된 감정에 알맞은 감정적 혹은 행위적 대응 능력)을 할 수 있는 총체적인 역량을 일컫는 단어로써, 최근 다양한 연구를 통해 창의성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시 패트리샤 무어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패트리샤 무어는 할머니와 주변의 노인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접하는 것을 지각하였고 (의식), 이러한 차이들에 대해 노인들이 느끼는 신체적 불편함과, 그보다 더 불편한 사회적 시선을 받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인지). 그리고 이를 원동력 삼아, 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불편함을 견디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려 노력했고, 행동함으로써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었다 (대응).

소보로 윤지현 대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윤지현 대표는 청각장애학생들이 강의중심의 수업에서 느끼는 격차와 좌절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고(의식), 그들이 현장에서 겪는 좌절감과 바램을 동시에 이해하였다(인지). 그리고 이를 원동력 삼아, 현실에 뛰어들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양한 음성변환서비스를 세상에 선보여 많은 이들에게 소리를 통해 만든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감정지능의 핵심이 담겨있다. 패트리샤 무어와 윤지현 대표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질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은 공감은 영화관에서 슬픈 장면에서 울거나, 재미있는 장면에서 웃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감정지능은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으로 이어질만큼 가슴 속 깊이 해당 감정이 스며드는 것이다. 이는 창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줄 수 있다. 창업을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점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한 과정이다. 고객의 진정한 마음과 바램에 대해 온갖 아이디어와 가설들이 회의실 탁자 위로 오간다. 하지만, 실천으로 또 행동으로 옮겨질 결심이 서지 않는 다면, 결과적으로는 고객의 마음에 대한 멋진 토론에 그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일갈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기업이란 현실이요, 행동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 기업이 클 수가 없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

◆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것에 주목하라.

많은 이들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는 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한 교육 방법을 제공하는 다양한 기관 및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의 마음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펴보고,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작은 것부터 깊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는 마음의 소리를 공감이라는 도구로 형상화해서 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창조해 나가는 의미도 크지만, 모두가 아는 것을 실천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도 창의성이고, 오히려 혁신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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