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잃은 컴퓨텍스의 복안

지난달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일간 대만 타이베이에선 ICT 전시회인 컴퓨텍스 타이베이(COMPUTEX TAIPEI, 이하 컴퓨텍스)가 개최됐다. 이번 컴퓨텍스에서 내세운 다섯 가지 키워드는 AI와 로보틱스, IoT 앱, 혁신과 스타트업, 비즈니스 솔루션, 게이밍과 VR이다.

천젠런 대만 부총통은 개막식 기조 연설을 통해 “올해 컴퓨텍스는 IoT와 스타트업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대만 정부의 ‘아시안 실리콘밸리’ 개발 계획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기획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컴퓨텍스 2017을 통해 대만 정부는 대만을 글로벌 하이테크(high-tech) 스타트업의 전략적인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큰 그림을 내비쳤다. 과거 미국 실리콘밸리의 기적을 다시 한번 이곳 대만에서 부흥하겠다는 전략이다.

컴퓨텍스가 내건 올해의 아젠다는 이런 대만 정부의 큰 그림과 궤를 같이 한다. ‘글로벌 기술 플랫폼 구축’이란 명제는 한때 PC분야에서 R&D와 제조를 주름잡던 그들이 꺼내 든 회심의 카드다.

이 때문일까? 올해 컴퓨텍스를 참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를 거듭할 수록 볼게 없어진다고 불평이 자자하다. 이제 신제품은 연초에 열리는 CES를 통해 쏟아내기 바쁘고 통신분야는 MWC, 가전은 IFA로 거의 굳어가는 분위기다.

한마디로 컴퓨텍스는 설 곳을 잃었다. 지난 수년 간 컴퓨텍스는 최신 PC부품이 쏟아지기는 커녕 후발주자에게 하나둘씩 큰 먹거리를 내주기 바빴다. 가장 큰 원인으론 십여년전부터 제조 단가 문제로 이전하기 시작한 중국 본토 입성을 들 수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전략적으로 R&D는 대만, 제조/생산은 중국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대세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사이 상황이 급변했다.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회사가 중국에서 생겨났고 이들을 중국발 돌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파급력을 지녔다. 제조 능력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수율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마데차이나(Made in China)’라고 폄훼하던 사람들은 어느덧 ‘대륙의 실수’란 제품을 손수 직구까지 해가며 구입하는 세상이 돼 버렸다.

폭스콘 같은 까다로운 애플 마저도 생산력을 인정하는 제조 능력을 가진 중국을 라이벌로 삼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렇다고 기존 기술을 기반으로 경쟁하기엔 자본과 생산능력의 격차를 좁히기 역부족인 상황이다.

어찌보면 ‘Back to the basic’을 외치며 대만의 IT인력이 기초 기술을 위한 스타트업에 힘을 쏟는 건 필연적인 선택이다.

제임스 황 TAITRA 회장은 “컴퓨텍스 2017 사전 참가등록자 수가 전년 대비 10.5%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성장동력을 잃은 상황에서 참관객수의 증가는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들의 분석처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컴퓨텍스에 대한 업계의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냄과 동시에 글로벌 ICT 관계자들과의 보다 깊은 관계 구축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컴퓨텍스 d&i 어워드(COMPUTEX d&i awards)에도 글로벌 ICT 산업 트렌드를 반영해 올해는 기존 카테고리에 AI, IoT, AR 및 VR 3개 부문을 추가했다.

전시장 부스 역시 최신 트렌드에 맞춰 4개의 테마관으로 개편했다. 먼저 스마텍스(SmarTEX)는 사이버 보안, 스마트 홈 및 스마트 엔터테인먼트, 스마트 웨어러블, 자동차 전자부품, 스마트테크 솔루션를 중점으로 다루는 곳이다. 아이템별로 보면 서로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이들은 상호 의존적인 성향을 띈다. IoT 기술 응용 분야는 물론이고 스마트 홈과 자동차 전자부품, 특히 자동차 전장 분야에서도 자율 주행에 관련된 기기는 물류/유통망을 재편할 기간산업으로 발전할 공산이 크다.

고성능 게이밍 제품 및 VR 기기를 선보이는 게이밍 및 VR관은 가장 컴퓨텍스 전시장 중에서 가장 트렌디한 곳으로 볼 수 있다. 이미 HTC라는 걸출한 HMD 제작사를 보유한 입장에서 VR분야 만큼은 다른 곳과는 달리 물러설 곳이 없는 분야다. 특히 PC 하드웨어의 경우 VR환경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 개발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대만 회사의 주특기 중 하나다. 그리고 여전히 먹히는 ‘오버클러킹’이라는 카드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가장 컴퓨텍스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대표적인 테마관인 셈이다.

애플(Apple)의 MFi 인증을 받은 주변기기를 전시하는 아이스타일(iStyle)은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아직까지도 안드로이드의 수가 압도적으로 높으니 수익성을 따지자면 힘든 결정임에도 굳이 콕 집어 애플을 선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애플을 향한 대만의 적극적인 구애’다. 이미 단말기 시장은 포화 상태에 접어든지 오래다. 하지만 주변기기 시장은 다르다. MFi 인증을 받은 주변기기의 핵심 기지로 대만이 탈바꿈 할 수 있다면 충분한 수익 창출이 가능한 시장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보자. 데스크톱 PC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만의 모든 PC제조사들이 애플과 등을 돌리던 시절엔 대만에서 애플 제품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전세계 PC 부품 공장이던 대만이 애플 호환 제품을 생산하는 기지로의 환골탈태 역시 기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와중에 대만 정부의 「아시아 실리콘 밸리 추진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준비중이다. 이노벡스(InnoVEX)관은 지난해 처음 신설되어 아시아 최대 스타트업 플랫폼으로 성장을 목표로 포럼, 피칭(pitching) 콘테스트, 기술 시연, 매치메이킹(match-making)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스타트업들이 잠재적인 투자자와 파트너사를 찾고, 네트워킹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올해 이노벡스에는 23개국 272개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인큐베이션 센터 등이 참가한다.

이노벡스관에서 중점으로 다루는 분야인 IoT, 빅데이터, e-커머스, VR/AR, AI, 와해성 기술은(Disruptive Technology) 기존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꿀 ‘게임체인저’다. 가트너(Gartner)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모든 IoT 솔루션의 절반 이상이 설립된 지 3년 미만의 스타트업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들의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일본 후쿠오카와 타이페이스는 MOU를 맺고 양 도시간 해외진출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다. 이노벡스에 부스를 차린 한국관을 비롯해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부분이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상생이다. 본디 상생이란 게 서로의 이해 관계가 성립돼야만  가능하기에 쉽지도 않고 시간도 제법 걸린다. 적어도 대만은 그 중심에 서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만은 기존의 PC 하드웨어 분야에서 종주국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아시아에서 몇 안되는 탄탄한 IT 인프라를 갖춘 나라다.

그동안 보여줬던 혜안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큰 시장을 봐왔고 내수 보다는 수출에 먼저 눈을 떴다. 이건 중국인 특유의 상인 기질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습관이다.

국경은 더이상 제약이 되지 못한다. 어차피 요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대다. 이제 아시아 실리콘 밸리로 거듭나기 위한 판이 제대로 깔렸다. 볼거리가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이 컴퓨텍스라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주력 품목이 바꼈으니까.

이제는 조금 끈기를 갖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이야기는 조금 아껴 두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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