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블록체인, 혁신과 혁명 사이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에게는 2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을 것이다. 하나는 고려를 바꾸는 것이다. 즉 혁신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을 세우는 것이다. 즉 혁명이다.

우리는 역사를 안다. 혁신은 안 됐고 혁명은 됐다. 아마도 혁명가도 처음엔 모두 한 뜻을 가진 혁신가였을 것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친구였던 것처럼. 그러나 수많은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던 혁신가들은 이런 식의 자문자답을 했을 것이다. 고려에는 아직 희망이 있는가? 어쩌면 하늘은 이미 오래 전 고려를 버렸을지 모른다.

지금의 미디어가 처한 현실도 고려 말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혁신을 할 것인가? 혁명을 할 것인가? 언론사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할 것인가? 거대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에 대항하면서 더 많은 것을 달라고 조를 것인가? 아니면 혁신은 안 되고 혁명을 생각해야 할 때인가?

미디어 블록체인은 미디어 혁명가를 위한 기술이다. 미디어 블록체인에 대한 연구의 제1독자 역시 미디어 혁명가이다. 레거시 미디어 안에서 온갖 혁신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본 미디어 혁신가들은 자포자기하듯 혁명으로 전향한다. 이들은 더 이상 언론사에게 개발자를 뽑으라고 하지 않는다. 네이버와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를 규제해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미디어 블록체인 생태계를 이끌어가는 콘텐츠 창작자들은 처음부터 최고 기술 책임자(CTO, Chief Technology Officer)를 두는 미디어 스타트업으로 시작한다. 거대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의 흐름 속에 사라진다.

미디어 블록체인의 핵심 특성은 플랫폼리스(platformless)다. 플랫폼리스란 플랫폼은 있지만 플랫폼 사업자는 없는 상태를 뜻한다. 예컨대 네이버 서비스는 있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네이버라는 사업자는 없다. 그 결과 플랫폼 사업자가 가져가던 초과이익은 창작자와 사용자에게 재배분된다. 미디어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은 오랫동안 성장한 중앙화된 기존 미디어 플랫폼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부족해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P2P(peer to peer) 기반인 블록체인 특유의 탈중앙화의 가치, 플랫폼 사업자가 아닌 창작자와 사용자가 중심이 되는 특성에 기초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갈 수도 있다.

오픈소스 생태계 내에서 미디어 플랫폼 기술은 공개되고 공유되면서 점점 더 쉬워진다. 최고의 콘텐츠 창작자는 쉬워진 오픈소스 플랫폼 기술을 활용해 직접 내부 개발자를 채용하고 외부의 전문 개발사의 도움을 받고 오픈소스 생태계의 개발자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개발자 집단과 협력해 자신만의 플랫폼을 개발한다.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그로스 해킹을 수없이 수행하고 그 결과를 자동으로 반영해 플랫폼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생태계를 키워나간다.

미디어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은 암호화폐 기반 보상 체계를 바탕으로 광고보다는 저작권료에 기초해 운영된다. 덕분에 창작자는 더 적은 사용자에게 소구하더라도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창작자는 보다 개성 있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사용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미디어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은 창작자와 사용자의 세분화된 콘텐츠 양식에 최적화된 형태로 개발된다. 플랫폼의 세분화된 양식에 최적화된 콘텐츠가 해당 플랫폼을 바탕으로 더 효율적으로 생산된다. 분화된 바로 그 양식의 콘텐츠를 잘 만드는 창작자들과 그 양식의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용자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모여든다.

플랫폼의 양식 내 독점과 양식 간 경쟁 논리에 따라 플랫폼은 더욱더 세분화된다. 수없이 많은 미디어 플랫폼과 콘텐츠가 나선을 그리며 폭증한다. 사용자는 수많은 미디어 플랫폼들을 동시에 사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사용자가 플랫폼을 사용하기 위해서 본인을 증명하는 단계를 넘어서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완전한 플랫폼리스 단계로 이행한다.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행한 보고서 ‘박대민, 명승은(2018) <미디어 블록체인, 플랫폼리스의 기술>’을 일부 수정해 올린 것입니다. 관련 내용 원문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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