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복제시대의 뉴스 그리고 유료화 (1)

1. 원본의 특별한 가치

조금 엉뚱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 원본은 왜 특별한 가치를 가질까? 원본에 대한 열광과 감화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저명한 문예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우라’라는 개념을 동원한다.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발터 벤야민 (2012).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50쪽)

정의는 모호하고 개념은 애매하다. 종교적 기술이기도 하고 철학적 논법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이라는 단어와 일회적이라는 단어를 빼내볼 수가 있다. 원본의 특별한 가치는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간에 배치돼 일회적으로만 구성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시간, 그 공간에서 단 한 번만 제작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이렇게 탄생한 원본의 아우라는 지속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바로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가치가 여기에 존재하는 셈이다. 이 아우라는 모사될 수도 복제될 수도 없다. 오로지 원본만이 아우라를 지닌다.

2. 그 많던 사진사는 어디로 갔는가.

졸업식을 떠올려보자. 10여년 전 아니 20여년 전 졸업식. 그곳엔 어딘가엔 늘상 전문 사진사가 있었다. 개인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시대, 그들은 호황을 누렸고 우리의 행복을 기억과 추억으로 담아줬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서 있던 자리, 그들의 숙련된 사진술은 디지털 카메라에 정복당했다. 누구나가 사진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디카 하나면 언제든 비싼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현상과 인화에 필요한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행복을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됐다. 졸업식 현장에서 그들의 존재는 잊혀졌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이미 등장했다. 그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이를 ‘기술적 사라짐'(Technical Disappearance)이라고 표현하자.

3. 디지털 복제의 시대

기술적 복제는 디지털 복제라는 이름으로 보다 더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비트화 된 책, 기사, 음악, 영화 등은 매일매일 복제되고 전파되고 소비된다. 기술은 더 쉬운 복제술을 탄생시키고 있다. 반작용으로 복제를 차단하기 위한 또다른 기술이 등장하고 있지만 복제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늘상 한계를 드러낸다. 한때 복제는 예술적 수련을 위해 도제에 의해 행해졌고 대가의 작품을 전파하는 목적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복제는 상업화된 작품에 폭넓은 소비와 향유를 목적으로 행해진다. 예술의 상업화에 대한 저항적 의미도 내포돼있다. 어쩌면 상업화 속에서 약해지고 있는 원본의 아우라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기도 하다.

4. 아우라를 상실한 뉴스

뉴스로 돌아오자.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떠난 정보재 즉 뉴스는 온라인으로 복제되면서 그것의 가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복제된 뉴스는 다시 복제와 복제를 거듭되면서 원본의 존재를 상실한다. 무엇이 복제이고 무엇이 원본인지 확인하기조차 버겁다. 복제의 연속적 반복은 원본의 잊혀짐을 낳는다. 이것이 디지털 복제시대의 특징이다.

그리고 시민저널리즘의 시대이다. 독자는 필자가 된다. 기자 이상의 전문성과 새로운 시각으로 독자가 독자를 만난다. 기자가 서있던 자리는 위태롭다. 기자의 독점적 사유물이었던 펜은 블로그로 시민저널리즘 뉴스 사이트의 에디터 창으로 민주화됐다. 독자들에게도 펜을 쥐어졌다. 졸업식 사진사의 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어느 공간에서 기자의 자리를 없어질 수도 있다. 기술적 사라짐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 없는 상황이다.

뉴스스탠드 개편 이후 우왕좌왕하고 있다. 떨어진 트래픽을 만회하기 위한 세속적인 아이디어들이 난무한다. 본질의 문제로 접근하는 노력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단기적인 대증요법만을 고민하고 기대한다. 신문 뉴스의 복제품을 다시 복제하면서 연명해온 방식에 과연 답이 존재할까? 울툴불퉁하기 짝이 없는 커다른 돌을 깎아 다보탑을 주조해냈다면 21세기 원본의 캔버스는 이제 온라인이 됐다. 돌과 종이는 온라인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온라인은 신문 복제물의 전시장에 그치고 있다. 그곳에서 원본은 희귀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레니 리펜슈탈을 기억하는가. 대중 연설 능력이 떨어지던 히틀러를 예술로 재탄생시킨 장본인이다. 뉘렌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의 전당 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 이를 통해 그는 예술의 정치화를 완성해냈다. 전무후무한 나치의 선동 영화가 영화라는 복제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그를 찬양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의미를 끌어내는 작업은 시도하자. 그의 작업은 복제되지 않는 아우라를 복제를 통해 재조합,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아우라의 복제가 아니라 복제를 통한 조작된 아우라의 구축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다.

뉴스의 생존을 위해서는, 심지어 유료화를 위해서는 원본의 핵심 가치 즉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우라는 무엇인가. 경험이다. 그 공간, 그 시간에 일회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의 총체다. 김홍도의 ‘빨래터’를 복제의 과정을 거친 교과서에서 볼 때와 단원풍속도첩에 담긴 원본을 볼 때의 의식적, 무의식적 감흥이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다시 경험이다. 원본만이 줄 수 있는 아우라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복제되지 않는 아우라를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감흥은 감동은 복제될 수 없다.

5. 아우라 되찾기 위한 노력

내용적 접근과 형식적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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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http://www.flickr.com/photos/56176610@N00/291632798

글 : 몽양부활
출처 : http://blog.ohmynews.com/dangun76/49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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