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중’이 ‘나’를 정의한다 (My Audience Define Who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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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를 즐겨 사용하는 독자라면 ‘소셜 미디어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 청중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내 청중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등에 대해 궁금해 했을 것이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사용자 정체성 관점에서 찾는 시간을 갇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두 포스트에 걸쳐 사용자 정체성을 형성하는 4가지 요소에 대해 논의했다. 동일시와 차별화, 그리고 사적영역, 공적영역이다. 이번에는 4개 요소를 스키마로 정리한 뒤, 필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 요소들이 정체성 형성과정에서 작용하는지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청중(audience)이 사용자 정체성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논의한다.

사용자 정체성의 4가지 요소

각 요소는 이미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다. 아래의 스키마는 맥루한(McLuhan)이 ‘미디어의 법칙‘에서 제시한 테트라드를 응용(hommage)한 것이다. 각 요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만 어느 한가지 요소가 원인이나 결과가 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 대신 4가지 요소의 작용은 동시다발적이며 상호연결되어 있다.

사용자 정체성에 필수적인 4개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작용하는 관계에 있다
사용자 정체성에 필수적인 4개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작용하는 관계에 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분리되있던 상황에서는 위의 테트라드가 성립될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적 영역과 분리 되어야만 사적 영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단절이 서로를 존재하게 했다. 그러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은 더 이상 어려워졌다.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는 두 영역의 경계가 없다. 사적인 나(Private Me)와 공적인 나(Public Me)가 공존한다. 구분이 없어진 것 뿐만 아니라 ‘공생(symbiosis)’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동일시와 차별화는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동시에 형성하는 요소이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차별화만 일어나고 사적인 장소에서는 동일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차별화와 동일시의 끊임없는 동시 작용으로 살아간다. 특히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공존하는 소셜미디어에서는 더욱 그렇다. 동일시, 차별화, 공적인 나, 사적인 나의 작용은 끊임없는 화학작용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을 매일 오가닉 미디어를 통해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나의 정체성 찾기

필자가 페이스북에서 규칙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몇 달 전이다. 프로필도 있고 친구도 있었지만 포스트를 작성하거나 다른 사람 글에 반응하는 일도 없었으니 죽어있던 홈페이지였다. 그러다 오가닉미디어랩에 콘텐츠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를 알리는 채널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페이스북이다. 아직은 네트워크가 페이스북의 평균에도 못미치는 규모지만 최근 4-5개월에 걸쳐 흥미로운 스토리를 경험했다.

1. 나의 모습을 드러내다

우선 오래된 프로필을 업데이트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해왔고 현재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또박또박 적었다. 사적인 나를 공적인 공간에 드러냄으로써 정체성 만들기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이다. 자주 드나들면서 포스팅도 하고 다른 글에도 반응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했다. 이제는 오가닉 미디어랩의 글이 아니라도 재밌는 글을 읽으면 저절로 공유버튼에 손이 가는 버릇도 생겼다.

포스팅을 모두 합치면 관심사도 쉽게 추정된다. 특히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주로 공유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기존 소셜 미디어 관련 글들과 자연스레 차별화가 시도되었다. 기존에 간과되었거나 사람들이 실행에 바쁜 이유로 멈춰 서서 보지 못했던 주요 과제들을 먼저 다뤘다. 배우고 경험한 것을 나눈다는 사명감 뒤에는 필자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니즈도 컸다.

동일시 활동도 병행되었다. 뉴스피드에서 무릎을 탁 치는 좋은 글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른다. 혼자 읽기 아까운 포스트는 공유도 한다. 공유는 ‘좋아요’보다 참여적(engaging) 행위로, 강력한 공감이다. 가시적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를 타인의 판단에 맡기는 행위이다[Erving Goffman, Interaction ritual: essays in face-to-face behavior, 1967, ]. 이 때 타인이 나를 판단하려면 기준(reference)이 필요하다. 누가 어떤 내용에 누구와 공감하고 동일시 하는지 그 경험의 반복이 기준을 만든다고 하겠다. 포스팅을 통한 차별화와 더불어 타 포스트에 대한 나의 동일시 과정은 사람들에게 기준을 만들어주었다.

2. 친구들이 나를 판단하다

그렇게 미디어의 근본적인 문제정의 작업을 반복했는데, 그 차별화에 대한 노력은 사람들의 피드백으로 돌아왔다. 친구 신청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가닉 미디어랩의 블로그를 보고 왔다고 했다. 동시에 블로그 포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이 나에게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해주는 좌표가 되었다.
정체성을 제조하는 과정이 개인적인 활동에서 끝난다면 세상에는 서로 완전히 차별화되는 개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차별화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누적되면 기존에 존재하던 (혹은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집단과 동일시가 일어난다. ‘이런 사람’으로 그룹핑된다.

주제나 스타일은 사용자별로 매우 상이하겠지만 과정은 동일하다. 필자의 지인이 올리는 줄기찬 ‘먹방’ 포스트는 처음엔 뭔가 했다. 그런데 계속 쌓이다보니 이제는 웃음코드가 되었다. 그의 유쾌한 정체성이다. 이처럼 필자도 어떤 유형에 소속되고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필자가 이런 글쓰기를 계속한다면 특정 집단과 더 분명한 동일시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더욱 분명한 차별화가 생길 것이다.

필자의 뉴스피드에서 줄기차게 음식 사진을 올리는 지인의 포스트는 그 히스토리가 쌓여 이제는 반가운 웃음코드가 되었다
필자의 뉴스피드에서 줄기차게 음식 사진을 올리는 지인의 포스트는 그 히스토리가 쌓여 이제는 반가운 웃음코드가 되었다

물론 필자도 동시에 타인을 판단하는 입장이 되었다. 뉴스피드를 계속 받다 보니 저널리즘의 돌파구를 찾는 집단, 벤처 생태계를 만드는 집단, 데이터를 공유하는 집단 등 구분이 점차 명확해졌다. 처음에는 지인 몇몇에서 출발했다. 이들이 공유하는 콘텐츠를 찾아가서 읽다보니 저자를 만나게 되고 친구도 맺었다. 그리고 그 분야의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필자에게로 왔다. 이렇게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람들이다. 공동 친구(mutual friends)의 수가 점차 늘어 3~40명씩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서로 차별되면서도 유사한 집단들의 합이 현재 필자의 친구 리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집단과의 차별화와 동일시는 동시에 일어난다. 특정 집단과의 동일시 과정은 다른 집단과의 차별화를 뜻한다. 그리고 앞으로 집단에 동일시가 뚜렷해질수록 필자는 더욱 그 집단의 사람들과 차별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동일시와 차별화가 역동성을 잃으면 프로세스도 중단된다. 나의 성장과 도태는 동일시와 차별화 작용이 누적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특정 목적을 위해 소셜 미디어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집단에는 사적인 관계도 있다. 프로필을 페이스북에 노출함으로써 필자의 사적인 나는 공적인 나와 공존을 선언했다. 또 전공분야의 글을 포스팅하면서 뜻밖에 필자의 사적 네트워크의 사람들과도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모습을 자꾸 드러내다 보니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도 많아졌다. 메신저라는 사적 도구의 이용도 늘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공존하는 네트워크, 즉 오가닉 미디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Audience’가 나를 정의한다

지금까지 페이스북에 나를 드러내는 활동과 이에 따른 피드백 프로세스를 설명하였다. 결국 정체성을 위한 이 모든 과정에서 나를 정의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렇다. 내가 아니다. 정체성은 임의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청중(audience)‘을 통해서만 정의된다. 프로필 페이지에 나를 드러낸다고 해서 청중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포스트를 계속 쓴다면 그것도 정체성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벤트 마케팅을 기반으로 상호작용이 일어나더라도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반응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정체성이 형성된다. ‘청중’으로 식별되는 그룹이 생겼기 때문이다[A. Marwick and d. boyd. I tweet honestly, I tweet passionately: Twitter users, context collapse, and the imagined audience, New Media & Society, 2011].

그렇다면 청중이 평가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나의 청중인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한사람 한사람이, 그들이 모인 집단의 속성이 그리고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따라 내가 결정된다.

지금 페이스북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3-40명, 그리고 블로그 포스트를 공유해주는 약 100명의 사람들로 체감된다. 그리고 필자의 블로그를 읽는 1,000명 정도가 청중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분석하면 내가 나올 것이다. 물론 최근 스탠포드 대학에서의 연구 결과와 같이, 실제 청중의 규모는 더 클 수 있다[Michael S. Bernstein, Eytan Bakshy, Moira Burke, Brian Karrer, Quantifying the Invisible Audience in Social Networks, CHI 2013].

다만 여기서 우리의 문제는 청중의 규모나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내 정체성에 있어 청중이 함축하는 의미다. 청중으로 식별된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누구이고 나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가 나를 말해준다. 또한 필자는 공적인 이야기만을 전달했지만 공적 공간에서의 가시성이 사적 네트워크에도 전달되었다. 이 사적인 관중이 있는 한,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는 페이스북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다.

청중이란 차별화와 동일시, 사적인 나와 공적인 나의 동시 작용의 결과이다. ’가시적으로’ 생산되고 측정이 가능한 집단이다. 나와 동일시되고 차별화되는 사람들의 합이기도 하다. 4개의 요소가 직접 내 정체성을 생산하지 않고 청중을 생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도(내 조직도) 내 청중도 미리 정해진 바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필자가 의도했던 것처럼 목표가 있을 것이고 대상 집단이 가설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청중은 매일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한명 한명의 합이다. 이들을 통해 내가 정의되고 수정되고 진화한다. 한번 타겟팅으로 끝이 아니다. TV와 신문에서 시청률과 도달률이라는 양적 규모에 집중하는 관점과 다른 점이다.

오히려 포스팅 하나 하나 그리고 상호작용 하나 하나의 과정에 타겟은 끝없이 구체화된다. 그들의 나에 대한, 내 조직에 대한 판단도 구체화되며 나의 차별점과 유사점도 구체화된다. 타겟이 청중이 되고 네트워크로 자라나는 과정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는 멋지고 거대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오가닉 미디어에서 청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쩌면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반복이다. 하지만 그 성실하고 반복적인 과정이 결국 나를 정의하게 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4가지 요소는 결국 청중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많은 공유와 피드백 부탁드리며 글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일러두기: 1. 데이터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다. 여러 관점에서 학제간 연구가 이어지는 단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4요소의 관계와 과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맥루한의 테트라드를 차용하게 되었다. 더 좋은 의견을 나눌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다.)

글 : 오가닉 미디어랩
출처 : http://goo.gl/pzZ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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