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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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할 때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성취하려고 노력했지만, 벽에 막혀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처음엔 이 고비만 넘기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란 확신으로 벽을 뛰어넘으려 한다. 하지만 만만하게 봤던 그 벽은, 몇 번의 실패를 통해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처럼 인식된다. 결국 긴 시간동안 품었던 꿈은 떨어져 깨지고, 좌절하고 만다. 삶이 그 꿈만으로 온전히 채워졌다면,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난관을 만나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벤저민 리벳이 1983년에 실시한 실험이 있다. 실험에 참가한 피험자에게 기분이 좋을 때 오른손의 집게 손가락을 움직이도록 지시하고 이때의 뇌파를 기록했다. 그랬더니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생각했을 때보다 500밀리초 전의 시점에 이미 뇌파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적인 전후 관계만으로 뇌가 원인이며 우리의 의사가 그 결과라는 인과는 증명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뇌활동에서 우리의 의사를 예측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컨데 오른손을 움직일지 왼손을 움직일 피험자가 마음속으로 결정하는 것을 그보다 앞선 시점의 뇌 활동에서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존딜런 헤인스는 fMRI를 사용해 뇌활동을 측정했다. 뇌파에서는 센티미터의 뇌활동을 측정할 수 있었지만, fMRI에서는 몇 밀리미터로 뇌활동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뇌의 전두엽의 활동패턴을 바탕으로 피험자가 어느 손을 움직이려고 했는지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의사를 결정하는 8초 전부터 말이다. 그리고 그 확률은 80퍼센트였다. 새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두정엽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환자는 손을 움직이고 싶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반대로 운동전영역을 자극하면 실제로 손이 움직이지만, 환자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결과는 무엇을 의미할까? 적어도 손을 움직이려는 의사를 만들어내는 뇌와 실제로 손을 동작하는 뇌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손을 움직이려고 생각하고 나서 손이 움직였다는 인과관계는 우리의 주관적 세계에서만 성립한다. 뇌의 신경 세포 활동이라는 객관적 세계에서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의 미래를 내가 결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뉴톤 하이라이트,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에서

위의 실험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한낱 뇌활동의 착각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결정론적인 과정에서 보자면 뇌의 활동은 환경에 의해 입력되는 자극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고, 인간은 뇌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이 몸을 제어한다는 환상을 가질 뿐이다. 물론 이것이 과한 해석이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완성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저지르거나 좌절할 때,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심리치료사의 삶을 살던 빅토르 프랑클은 1942년에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3년 간 강제수용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끔찍한 모든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강제수용소 생활을 천신만고 끝에 마치고 풀려 나서 그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으로 엮어 낸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수용소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졌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친구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을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밖에 도움에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 받지 않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족도 자유도 모두 꿈도 사라진, 삶에 대한 연속성마저 확실하지 않은 수용소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타인에 의해 강제된 물리력으로 모든 자유가 사라진 그 곳에서 자유의지가 움틀 자리가 과연 있을까? 빅토르 프랑클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가 사라진 수용소에서도,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은, 그 하찮은 현재의 삶을 미래로 움직이게 하는 작은 희망과, 그 희망을 부정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Source : http://flic.kr/p/oca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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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으로부터 강제된 자유의지란, 절망에 꺾여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좌절보다 더 나쁘다. 말하자면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 그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서 항상 패자의 자리에 있는 이에게 그 잘못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나약함과 자유의지의 부족이라고 말하는 건 옳지 못하다. 하지만 그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미래로 향하게 만드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는 매우 중요하다. 수용소에서 극악의 현실을 연명하고 소중한 삶을 지속하게 하는 미래의 끈을 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적 발견은 조심스럽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착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아직 밝혀내야 하는 게 많이 남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이 느끼는 자유의지란 한낱 착각일 수 있다. 만에 하나 인간이 느끼는 자유의지라는 게, 주관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그런 착각 덕분에 불합리한 세상에서 무언가 개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준다면, 착각에 불과한 느낌이라도 정말 의미가 있다. 오늘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결국 뭔가 나아지려면 내일을 영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래에 희망을 걸겠다는 자유의지가 매우 중요하단 뜻이다.

 

글 :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686

About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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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환은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 관리, 프로세스 컨설팅 등의 업무를 십 년간 수행했으며, 현재는 차량용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다. 읽은 것과 생각한 것을 블로그(http://talk-with-hani.com)와 트위터(http://twitter.com/talkwithhani)에 꾸준히 남기려고 노력한다. 지은 책으로는 '시지프스를 다시 생각하다',‘겸손한 개발자가 만든 거만한 소프트웨어’와 ‘도와주세요! 팀장이 됐어요’가 있으며, 다수의 IT서적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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