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45) – 구글, 광고의 제왕이 되다.

1969년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쉐릴 샌드버그는 1991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학생에게 수여하는 존 윌리엄스상까지 수여한 최고의 인재였다.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로 일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에게는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을 결정하던 실세이며 하버드 대학의 혜성같이 나타난 신성 로렌스 서머스였다.

from plus.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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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대학을 졸업하고 월드뱅크(World Bank)에 직장을 구한 그녀는 주로 인도의 나병이나 AIDS 등과 같은 보건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경험을 쌓고 1993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을 해서 1995년 MBA 학위를 취득하는데, 이 때에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하버드 MBA 과정 학생들 중에서 최고의 성적과 상을 휩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졸업 후 1년 정도 최고의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McKinsey & Company)에서 경험을 쌓고 있던 그녀를 부른 사람은 자신의 은사인 로렌스 서머스였다.

로렌스 서머스는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인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을 보좌하는 차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쉐릴 샌드버그는 가장 믿을만한 제자였다. 로렌스 서머스의 호출로 그후 4년 반 정도 미국 재무부의 특별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긴 쉐릴 샌드버그는 로렌스 서머스가 재무부 장관이 되자 수석참모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2001년 1월 클린턴 행정부의 임기가 끝날 때가 다가오자 그녀는 워싱턴을 떠나야했다.

이 시점에 그녀에게 다가가서 자리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새롭게 구글의 CEO 자리에 올랐던 에릭 슈미트이다.

에릭 슈미트의 매력적인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쉐릴 샌드버그는 에릭 슈미트가 자신에게 제안한 ‘사업유닛 총괄관리자’라는 직책의 실체가 거의 없다는 느낌에 구글로 옮기는 것을 많이 주저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구글은 제대로된 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고, 엔지니어의 천국이나 마찬가지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릭 슈미트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특히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회사에서 한번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꼬심에 넘어가서 그녀는 구글의 268번째 직원이 되었다.

그녀가 구글에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구글은 CFO도 없었다. 그 덕에 입사하자 마자, 에릭 슈미트가 그녀에게 맡긴 비밀업무 중의 하나가 만약을 대비한 자금줄을 잡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구글이 내부에서의 생각과는 달리 외부에서는 매출모델을 만들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 낮은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대신 제대로 된 사업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충언을 하였다.

당시 구글의 사업과 운영부분은 오미드 코르데스타니(Omid Kordestani)가 총괄하고 있었는데, 쉐릴 샌드버그는 그의 휘하에서 애드워즈(AdWords) 사업의 혁신을 이끌겠다고 자청한다. 특히 그녀는 오버추어와 유사한 CPC(Cost Per Click) 모델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고, 이 모델이 통하기만 한다면 광고판매를 하러 다닐 필요가 없고, 광고주들이 키워드당 가격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클릭이 되었는지도 알 수 있으며, 검색결과 상위에 올라갈수도 있기 때문에 검색광고 시장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던 에릭 슈미트는 코르데스타니의 팀에 살라르 카만가르까지 합류시키며 총력전을 펼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광고의 연관성을 평가한 데이터와 클릭당 비용모델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구글의 창업자들이 늘 주장하던 광고가 검색의 결과를 왜곡시키는 모양새를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제나 딜레마로 남아있었던 광고판매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롱테일을 집중공략할 수 있었기에 과거 전화번호부 이외에는 마땅한 광고수단이 없었던 소상공인들이 온라인 광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시스템이 자동화되어 모니터링도 쉽게할 수 있었기에 커다란 매력이 있었다. 2002년 2월, 구글의 두 창업자는 쉐릴 샌드버그를 비롯한 새로운 팀이 개발한 애드워즈의 새모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과거 광고와는 달리 광고를 작게 한두 줄로 제한하고 글자 수도 95자가 넘지 않게 하는 등, 검색결과를 나타내는 곳에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동시에 광고수익이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했던 탓에, 새로운 애드워즈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는 당시로서는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이 모델이 성공한다는 것을 증명하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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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2001년 8천 6백만 달러의 매출을 내는데, 새로운 애드워즈가 적용된 2002년에는 4배가 넘는 4억 39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 1억 달러는 수익으로 남았다. 기술만 있었던 기업에 드디어 비즈니스 모델과 수익이라는 날개가 달리면서 로켓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글을 사실 상 날아오르게 만든 주역이었던 쉐릴 샌드버그는 애드워즈의 담당 부사장으로서 구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2007년 후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떠오르는 신성이자 당시 25세에 불과한 약관의 청년 마크 주커버그를 만나자 마음이 흔들린다. 마크 주커버그는 그녀와의 만남이 끝나자 페이스북의 COO(Chief Operating Officer) 자리를 맡을 사람은 그녀 밖에 없다는 결론을 사실상 내리고 그 다음달인 2008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Davos Forum, World Economic Forum)에서 그녀를 만나 공식적인 제안을 하였다. 2008년 3월, 페이스북은 공식적으로 쉐릴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의 COO 로 선임되었음으로 알렸다. 현재 쉐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전체적인 운영과 영업, 마케팅, 인사와 정책, 커뮤니케이션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2인자이다.

그녀가 어째서 당시로서는 불확실한 페이스북이라는 회사를 믿고, 구글이라는 세계 최고의 인터넷 회사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페이스북이라는 회사의 미래를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호사가들은 구글에서 자신의 상사였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와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년 샌드버그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이사로 선출되며, 같은 해 스타벅스의 이사로도 선임되었다. 또한, 유명한 연구소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이사직을 포함한 유수의 단체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파워여성 중의 한 명이다.

구글의 또 하나의 광고모델은 구글이 자랑하는 롱테일에서 나왔다. 에릭 슈미트는 이미 전 세계에 엄청나게 수가 많지만, 각각의 규모는 매우 작은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구글의 전략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구글의 롱테일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가 바로 애드센스(AdSense)이다. 흔히 롱테일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은 예를 드는 것이 아마존의 책 판매 현황이지만, 구글의 애드센스가 가져온 롱테일 현상이 어찌보면 더욱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고 시장을 단순화해서 보면 크게 세 가지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광고를 싣고자 돈을 지불하는 광고주, 그리고 광고를 실어서 이익을 내는 미디어, 마지막으로 광고를 보는 소비자이다. 이 중에서 광고주와 미디어 양측에서 모두 롱테일이 존재하는데, 광고주의 경우에는 신문이나 TV와 같은 일반적인 대중매체에는 광고단가가 너무 비싸서 광고를 내지 못하지만, 저렴하고 효과적인 광고방법이 있다면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그룹이 롱테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미디어의 경우에도 강력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광고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수익모델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대다수가 이런 롱테일에 속한다.

광고주의 롱테일은 대부분 지금까지 제대로 광고를 낸적 조차 없는 소기업이나 비영리조직, 개인 등이다. 그리고, 미디어의 롱테일은 광고게재를 성공시키지 못한 수 많은 웹 사이트 들과 같은 영세 미디어 들이다.

구글의 애드센스는 이들을 직접적인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즉, 이전에는 아예 광고시장 규모에 잡히지도 않았던 것을 새로운 시장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구글의 애드센스는 누구라도 쉽게 새로운 광고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여, 광고주가 광고문안을 만든 뒤에 광고비를 인터넷 상에 그 광고를 클릭했을 때에만 지불하면 되는 “성과급” 형태의 광고를 제공했기 때문에 광고주가 큰 무리없이 광고를 하고, 효과를 보면 광고비를 더 지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디어 입장에서도 영세한 미디어가 광고주를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미디어의 성과에 맞추어 전략만 잘 세운다면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광고수입을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애드센스는 재미있게도 G메일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G메일 개발팀에 있던 폴 부세(Paul Bouchet)가 이메일이 쓴 단어와 광고주가 선택한 키워드를 연동하는 것과 관련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 작업을 눈여겨 본 세르게이 브린이 아예 블로그나 홈페이지 어디에나 누구나 붙일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하여 만들어진 플랫폼이 애드센스이다.

애드센스 아이디어의 기본적인 시작은 폴 부세에서 비롯되었지만, 세르게이 브린의 생각을 이어받아서 애드센스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이끈 사람이 바로 또 한명의 구글의 여성파워 수전 워지츠키(Susan Wojcicki)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명 “애드센스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구글의 18번째 직원인 그녀는 현재까지도 구글의 제품담당 부사장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그녀의 여동생인 앤이 세르게이 브린과 결혼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구글 창업자의 처형이 된다 (비록 세르게이 브린의 외도로 이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다). 애드센스는 등장과 함께 돌풍을 일으키면서 과거에는 있지도 않았던 광고시장을 만들어냈다. 애드센스는 컨텐츠 웹 사이트를 ‘파트너’로 부르고, 이들에게 광고수입의 2/3를 주고 자신들이 가져가는 새로운 광고시장을 통해 웹 전체를 자신들의 광고 플랫폼의 대상으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2004년이 되자 애드센스는 구글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면서, 애드워즈와 함께 구글을 세계최대의 광고회사로 탈바꿈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렇게 구글의 수익을 만들어내는 양대산맥인 애드워즈와 애드센스는 모두 쉐릴 샌드버그와 수전 워지츠키라는 두 명의 여성에 의해 탄생하였다. 구글이라는 조직에 남성들이 훨씬 많지만, 이 두 여성들이 탄생시킨 두 가지 광고 플랫폼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구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속편에 계속 …)

글: 하이컨셉 & 하이터치
원문: http://health20.kr/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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