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47) –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세계 최고 소셜 웹 서비스의 태동

타임지는 주커버그를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1984년 생으로 당시 만 23세에 불과했던 이 청년은 포브스에서 선정하는 400명의 갑부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불리웠던 그는 뉴욕 인근의 치과의사 아버지와 정신과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컴퓨터에 미쳐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고등학교를 다닐 때 Phillips Exeter Academy에서 이후 페이스북에서 CTO(Chief Technology Officer)로 일하게 되는 애덤 단젤로(Adam D’Angelo)와 함께 우리에게도 익숙한 윈앰프(Winamp)의 플러그-인을 제작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플러그-인을 보고, AOL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큰 회사에서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이들은 대학에 진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단짝인 단젤로는 칼텍(Caltech)에 진학하면서 캘리포니아로 떠났고,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Mark Zuckerberg Facebook SXSWi 2008 Keynote by deneyterrio
Mark Zuckerberg Facebook SXSWi 2008 Keynote by deneyterrio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서 페이스북의 전신이 되는 인맥 사이트를 만들면서 그는 일약 기숙사의 스타가 되었다. 그렇지만, 일찍 가지게 된 아이도 길러야 했고 또한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커버그는 과감히 하버드를 중퇴하고 비즈니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가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페이스북은 세계최대의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의 문제아 

페이스북의 시작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다른 학교들과 달리 학생들의 기본적인 정보와 사진 등이 들어있는 디렉토리(이를 보통 페이스북이라고 한다)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에 페이스북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대학 측에서는 사생활 정보를 모으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는데, 이는 그가 3년의 시간을 보낸 Phillips Exeter Academy에서 전교생들을 위한 페이스북의 제작에도 관여했고, 이러한 학생들 디렉토리와 소셜 네트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프라인에서부터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호락호락 넘길 주커버그가 아니었다.

주커버그는 대담하게도 어느날 밤 하버드 대학의 전산시스템을 해킹해서 학생들의 기록을 빼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페이스매쉬(Facemash)라는 간단한 사이트를 제작하고서 학부 학생들의 사진들을 쌍으로 올리면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 지를 고르게 하였다. 불과 4시간 만에 450명이 이 사이트를 방문했고, 22,000 번이나 사진들이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이 사태를 뒤늦게 파악하고, 주커버그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이 사건으로 주커버그는 학교당국과 동료 학생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특히, 하버드 측의 학생정보에 대한 비공개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깨뜨리고 싶어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보공개의 열정과 해커 정신이 녹아든 작품이 바로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2004년 2월 공식적으로 오픈을 한 뒤, 하버드 대학의 인맥을 중심으로 그 세를 여러 대학들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늘린 뒤, 2005년 실리콘 밸리에 입성하면서 거침없는 성장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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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달러의 매수 제안을 거절하다. 

2007년말 테크크런츠(TechCrunch)에서는 야후에서 페이스북을 평가한 자료를 공개한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2010년에 매출 9억 7천만 달러, 그리고 4800만명의 사용자를 가질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는 매출규모는 비슷하게 예측했지만, 사용자 수는 10배 이상 뛰어넘었다. 2010년 6월, 페이스북은 전세계 회원 수 5억 명을 돌파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이 추정치를 바탕으로 야후가 페이스북에 10억 달러에 이르는 매수 제안을 했다고 한다. 10억 달러는 명실공히 억만장자(billionaire) 클럽에 들어가는 액수로, 이때 이미 주커버그는 억만장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엄청난 제안을 받고도 그는 야후의 제안을 거절했다. 물론 현재 페이스북은 당시 야후의 제안을 훌쩍 뛰어넘는 가치로 평가되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기업공개를 하고 계속 성정해 나가고 있기에 결과적으로는 당시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결정은 단순히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페이스북 이전의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유명한 마이스페이스는 뉴스코퍼레이션의 5억 8천말 달러의 매수 제안을 받아들였고, 유튜브 역시 구글에 15억 달러에 팔렸다.

보통의 기업가라면 이 정도 액수의 오퍼가 들어온다면 거의 틀림없이 받아들이지만, 약관의 대학생같은 사업가는 과감하게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사실 이는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는 도박이다.

페이스북 이전의 유명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였던 프렌드스터(Friendster)는 2002년 구글이 제시한 3억 달러의 매수제안을 거절하였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에 이르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제안을 거부한 프렌드스터는 인터넷 환경의 역동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실상 그 가치가 엄청나게 하락하고 말았다. 사실 페이스북도 이런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법이 없었다. 당시 시스코는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을 기업고객들에게 판매하는 Five Across라는 회사를 인수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왈롭(Wallop)이라는 서비스를, 로이터는 펀드매니저와 트레이더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페이스북과 같은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더욱 많고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아직 초창기로 볼 수 있는 회사에게는 얼마든지 더욱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커버그의 이러한 결정은 단순히 페이스북을 더욱 비싸게 팔기를 바란 것일까? 주커버그에 따르면 그의 비전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한다.

장기간의 계획을 가지고 구축하고 있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공동창업자들과 함께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오픈 마인드와 협업정신, 정보의 공유를 생명으로 하는 소셜 네트워크가 세계를 훨씬 살만한 곳으로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기업이었다. 아직 젊고 이상을 좇는 그들에게는 야후에서 제시한 엄청난 돈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 페이스북은 성장을 거듭하여, 구글의 가장 잘 나가는 인재들이 들어오면서 다른 창업자들의 입지는 축소가 되었지만 당시 페이스북과 마크 주커버그의 머리 속에는 그다지 돈이 중요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글: 하이컨셉 & 하이터치
원문: http://health20.kr/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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