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욱의 생각의 단편] 상생의 비즈니스문화

얼마 전 미국에서 오신 분들을 점심과 저녁에 연달아 만난 일이 있다. 각각 동부와 서부에서 오래 사신 동포분들인데 그분들과 한국의 비즈니스문화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기억해 두고 싶어서 간단히 메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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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만난 분들은 지난 라스베이거스 CES에서 뵙고 인사한 분들이었다. 전자제품을 기획해서 한국에서 제작한 다음 미국에서 유통하는 일을 오래 해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한국 대신 중국 주하이와 심천 쪽의 업체들과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한국업체들과 일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한국거래처와 일할 때 자주 듣는 것이 ‘우리가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업체에서 물량을 다 소화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은데도 ‘다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다른 업체에 일감을 나눠주면 왠지 질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집을 피우니 결국 주문을 다 한 업체에 했는데 나중에 납기 일주일 남겨놓고 ‘어려울 것 같다’고 사고가 터집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출장 나와서 간신히 문제를 해결한 일이 몇 번 있습니다.

반면 요즘 중국업체들과 일해보니 그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만 합니다. 하나만 집중적으로 팝니다. PCB면 PCB만 하고 나머지는 주변의 협력업체에 맡기는 것이죠. 서로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주문량도 적절히 나눠서 잘 처리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중국회사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중국업체들의 성장이 눈부시다는 얘기를 한다. 몇 명이 앉아 있는 단칸방 공장에 갔다가 일 년 뒤에 가보면 그 회사가 수십 명 아니 백 명이 넘는 회사로 성장해 있는 것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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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심천에 갔을 때 방문한 Atsmart라는 회사. 각종 IoT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직원이 50명쯤 된다. 그런데 이 회사가 설립된 지 불과 1년 2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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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만난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서 자라서 현지 인터넷 회사에서 일하다가 30년 만에 한국으로 와서 한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다.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 조국에 공헌하고 싶어서 일부러 한국행을 택한 멋진 분이다. 그가 미국에서 담당했던 업무는 주로 사업개발(Business development). 그런데 한국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충격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가지.

“미국에서 제가 평생동안 배우고 실행한 기업 간의 파트너십 개념과 한국에서의 파트너십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 같아서 놀랐습니다. 미국에서 파트너십이란 장기적인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돼야 하고 나의 성공이 파트너의 성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파트너십 관계를 맺을 때 ‘내가 저 회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기적이고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맺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들은 파트너십은 뭐랄까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에 가까웠습니다. 단방향입니다. 규모가 크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회사는 더 작은 회사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회사의 입장을 봐주지 않고 큰 회사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에도 이런 회사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작은 회사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줍니다.

이렇게 하면 생태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마치 나중에는 텅 빈 연못에 큰 물고기 한 마리만 남아 있는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더 많은 큰 물고기가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립니다. 이런 파트너십 문화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게 바로 한국 특유의 ‘갑을관계’라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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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만난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한국의 비즈니스문화가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들까지 포함해서 ‘상생’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란 탓일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경쟁자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고 배운 것일까.

자신이 잘 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하지 말고 외부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값을 주고 사서 쓰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회사들이 너무 많다. 어쩌다 필요해서 외부 서비스를 받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그 대가를 깎으려는 경우가 많다. IT프로젝트 하청을 주면 최대한 가격을 깎은 담당자가 칭찬을 받는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게 될 을회사의 입장을 걱정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 경험에서 하는 얘기다.)

반면 내가 미국 라이코스에서 CEO로 일했던 3년 동안 느낀 점은 그곳에서는 핵심이 되는 일 이외에는 모두 외부서비스를 사서 쓴다는 점이다. 급여처리서비스, HR서비스, 각종 IT서비스 등 각 틈새시장별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작은 회사라고 차별하지 않고 정해진 가격대로 대금을 지급한다. 직원들에게 너무 비싼 것 같다고 깎을 수 없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런 서비스에는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늦게 주는 일도 없다. 웬만한 서비스는 한 달 사이클로 대금을 지급한다. 콘트롤러(재무팀장)은 제때 돈을 지급해야 한다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늦으면 회사 신용에 영향이 온단다.)

돌이켜보면 그런 문화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미국의 작은 스타트업들이 의미 있는 틈새 서비스를 만들어 미국내의 수많은 대기업들에 판매하면서 성장하고 중견기업, 대기업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성장한 기업들이 또 상대방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사준다. 그렇게 서로 도와가면서 성장해 간다. 그야말로 상생의 기업 생태계다. 놀랍게도 중국에서도 이런 상생의 기업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CES에 어떻게 1천 개 가까운 중국회사들이 참가하게 됐는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CES에 참가한 한 심천회사의 부스. 참가하는데 총비용이 몇천만 원이 들지만,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한다.

반면 한국기업들은 다 직접 하려고 한다. 과실이 있으면 나누지 않고 독식하는 구조다. 그룹 내에서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두툼한 마진을 챙겨주는 거래회사들은 오너의 관계회사인 경우가 많다.) 하청으로 먹고 사는 작은 업체들은 대기업 눈치를 심하게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심지어는 정부조차 작은 기업들이 만드는 인터넷서비스, 소프트웨어나 앱을 직접 만들어 보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는 작은 기업에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몇몇 대기업집단 빼고 다들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이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국에서도 진정 강소기업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굵직굵직하고 건강한 물고기들이 가득 찬 아름다운 연못 같은 기업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상생’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온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게 된 느낌이었다.

글 : 임정욱
출처 : http://goo.gl/05Px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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