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컴퓨텍스가 꾸는 꿈

컴퓨텍스 타이베이(COMPUTEX TAIPEI)의 역사는 상당하다. 이 행사가 처음 열리는 건 지난 1981년. 횟수로 따지면 올해로 36년, 이젠 중년에 접어든 셈이다. 물론 인생에도 굴곡이 있듯 컴퓨텍스 타이베이도 대만 산업계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던 PC 부품 중심 사업의 성장도 맛봤고 반대로 지난 몇 년 사이에는 PC 산업의 쇠락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쳐야 했다.

실제로 컴퓨텍스 전시장을 처음 찾았던 건 지난 1999년. 지금부터 18년 전이다. 당시보다 전시장 규모는 커졌지만(물론 메인 전시장은 그대로다) 시간이 지날수록 PC 산업의 흥망성쇠를 감추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컴퓨텍스 전시장 곳곳에선 용산전자상가를 중심으로 한 국내 총판이나 수입상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물론 그때 수준은 아니지만 지금도 없는 건 아니지만 예전엔 대부분 새로운 상품 소싱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컴퓨텍스 기간 중 열리는 네트워킹 파티에 더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컴퓨텍스 행사는 2012년을 기점으로 행사 규모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어쨌든 컴퓨텍스 타이베이는 지금도 여전히 흔한 말로 세계 3대 IT 전시회, 규모 면에선 아시아 최대 규모 ICT 전시회로 꼽힌다.

◇ 중년의 컴퓨텍스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올해 내건 주요 키워드를 보면 사물인터넷이나 헬스케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클라우드 컴퓨팅, 웨어러블, 모빌리티와 인공지능 등이다. 그렇다면 컴퓨텍스에 가면 이들 ICT 기술에 대한 미래를 엿볼 수 있을까. 컴퓨텍스 2017 기간 중 발표된 몇 가지를 체크해보면 이렇다.

1> 인텔은 소문으로 돌던 코어i9 시리즈 모델을 발표했다. 최상위 모델의 경우 코어 수는 12∼18개로 늘었다. 최상위 모델로 따지면 18코어에 36스레드, 하위 모델도 12코어, 24스레드다. 인텔이 선보인 소비자용 CPU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코어 수가 많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텔이 내놓은 최상위 모델은 코어i7-6950X로 고작(?) 10코어에 20스레드였다. 이를 1.8배 끌어올린 것.

한편 AMD도 컴퓨텍스 기간 중 노트북용인 라이젠 모바일(Ryzen Mobile)과 데스크톱용 16코어, 32스레드 버전인 라이젠 쓰레드리퍼(Ryzen Threadripper) 등을 발표했다. 라이젠 모바일은 기존 라이젠의 모바일 버전으로 개발 코드명 레이븐리지(Raven Ridge)로 불리던 것이다. 물론 GPU와 CPU를 합친 APU이며 실제 제품은 올해 하반기 예정이라고 한다. AMD에 따르면 성능은 CPU 50%, GPU 40%가 높아지지만 소비전력은 50% 낮아질 것이라고 한다. AMD는 그 밖에도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32코어 CPU인 에픽(EPYC)을 6월 20일부터 출하한다는 것도 발표했다.

2> 이게 재미없다면 인텔이 발표한 컴퓨트카드(Intel Compute Card)는 어떨까. 크기가 거의 신용카드 수준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이 제품은 CES 2017 기간 중 발표했지만 컴퓨텍스 기간 중에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제품의 크기는 95×55×5mm. 내부에는 인텔 7세대 코어 브이프로(vPRO) 프로세서와 GPU, 메모리 4GB, SSD 128GB,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같은 무선 기능을 탑재했다.

인텔은 컴퓨텍스 기간 중 컴퓨트카드를 탑재한 소형 PC도 발표했다. 측면에 컴퓨트카드를 끼울 수 있는 슬롯을 갖췄고 USB 단자, 전원 버튼, 반대편에는 USB와 랜, 미니 디스플레이 포트와 HDMI 등을 갖췄다. 컴퓨트카드가 단순 PC 역할 뿐 아니라 다양한 기기에 내장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TV나 모니터, 냉장고 등 컴퓨팅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 간편하게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제품은 올 8월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3> 컴퓨텍스는 전통적으로 “인텔과 그의 친구들” 혹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그의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컴퓨텍스의 중심 격인 컴퓨팅 분야에서 주목받는 게이밍, 미래 ICT 기술 분야 중 하나로 꼽히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엔비디아 역시 이미 일정 지분을 확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엔비디아가 이번에 발표한 건 게이밍 노트북용 플랫폼인 맥스큐(MAX-Q)다. 엔비디아에 따르면 맥스큐 기술을 적용하면 최상위 그래픽 모델인 지포스GTX1080도 18mm 이하 얇은 노트북에 탑재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성능 노트북이라고 하면 무겁고 두꺼운 본체는 당연했고 발열은 필수였다. 맥스큐는 이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18mm 이하 두께에 2kg대 수준에 고성능 그래픽 기능을 내장할 수 있다는 것. 애플 맥북에어 두께가 17mm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전보다 고성능 노트북이 확실히 얇고 가벼워진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컴퓨텍스 기간 중에는 에이수스가 두께 17.9mm인 ROG 제피로스라는 GTX1080 노트북을 발표하기도 했다. 에이수스 뿐 아니라 맥스큐 노트북은 이미 19여 개 제조사가 제품화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사실 지포스 GTX1080의 경우 TDP가 180W에 이른다. 보통 게이밍 노트북이 필요로 하는 전체 소비전력이 90W라는 걸 생각하면 고성능 GPU를 노트북에 내장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맥스큐는 우주왕복선 등 로켓에 걸리는 최대 부하 지점을 말하는 항공우주공학 용어라고 한다. 가혹한 부하를 견딜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

엔비디아 측은 이를 통해 게이밍 노트북이 성능은 3배, 두께는 기존보다 3분의 1, 무게는 절반까지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또 맥스큐는 성능 외에 저소음에도 충실했다고 한다. 40dB 이하라는 것이다. 맥스큐 인증을 받은 노트북은 40dB 이하 소음을 보장한다는 것인데 이는 게이밍 노트북으로선 첫 인증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엔비디어는 이를 위해 위스퍼모드(WhisperMode)라는 저소음 기술을 채택했는데 이미 위스퍼모드에 의한 최적화 게임은 400개 이상이라고 한다.

4>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인텔, 퀄컴과 손잡고 항상 연결을 하는 올웨이즈 커넥티드(Always Connected) 구상을 발표했다. 차세대 유심인 eSIM을 내장, 윈도PC도 휴대폰처럼 언제 어디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게 해 윈도10 기능을 제공하는 모바일 기기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컴퓨텍스 기간 중 발표된 건 많지만 굵직한 것만 추려보면 이렇다. 이 중 어떤 게 ICT의 미래를 보고 주고 있을까. 물론 미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텔이 18코어를 발표한 사실은 현실이다. 딥러닝 분야에서 주목받는 엔비디아도 컴퓨텍스 기간 중에는 맥스큐처럼 주로 게이밍 컴퓨팅에 초점을 맞춘다. 대만 산업 자체가 인텔이나 엔비디아 등과 협업을 해야 하는 부품 기업이 여전히 주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윈텔 중심이더라도 컴퓨트카드 같은 건 IoT와 맞물려 관심을 둘 만하지만 이들 제품이나 컨셉트가 처음 발표되는 곳이 컴퓨텍스는 아니다. 인텔이나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퓨텍스 기간 중 발표하는 제품은 “자. 샘플 봤지? 앞으로 우리 이거 만들자”는 메시지다. 여전히 컴퓨텍스의 주류는 미래보다는 현실에 있고 모바일보다는 PC, 요즘 인텔 표현으로는 컴퓨팅에 있다. 그리고 이 시장은 지난 몇 년 사이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인텔 행사에 등장한 에이수스 회장 자니 시(Jonney Shih). 그를 만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매년 이 자리에 온다.

◇ 2년차 맞은 스타트업관, 중년의 재활 프로젝트=“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컴퓨텍스 방문이 몰락의 증거를 찾기 위한 건 아니다. 실제로 이곳을 가까이에서 보면 컴퓨팅 산업이 어떻게 바뀌려고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예컨대 2016년부터 컴퓨텍스를 주최하는 타이트라(Taiwan External Trade Development Council)가 추가한 글로벌 스타트업 테마관인 이노벡스(InnoVEX)를 들 수 있겠다.

컴퓨텍스 2016, 글로벌 스타트업의 부흥을 꿈꾼다

주최 측에 따르면 지난해 이노벡스관에 참여한 전 세계 스타트업 수는 100여 개 가량이다. 절반 가량은 타이베이에 위치한 대만 스타트업이 자리를 틀었고 나머지는 해외 기업의 몫이었다. 피팅 토너먼트를 열거나 주요 행사를 트위치를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컴퓨텍스의 변신에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대만 정부 차원으로 스타트업 발전에만 지난해 8,000만 달러를 쏟아 붓는 등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PC 산업 중심, OEM 중심으로 강점을 보이던 대만 IT 산업 체질을 바꾸려는(혹은 보완하려면)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올해는 규모가 더 늘었다. 참여 스타트업과 비즈니스 인큐베이터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23개국 272개로 지난해보다 2배 이상이다. 이노벡스 구성도 지난해 전시를 중심으로 피칭, 네트워킹 행사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전시와 포럼, 콘테스트, 시연, 매치메이킹 5가지 요소를 뼈대로 세웠다.

실제 이노벡스관을 보면 에이수스 같은 대만 IT 거대 기업이 몰린 전시장보다 화려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 이노벡스관을 시작한 지난해보다는 확실히 참여 기업도 늘었고 활기도 더해졌다.

물론 활기를 불러오는 스타트업 상당수는 여전히 해외 기업이다. 우리나라도 코트라 한국관,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 디캠프 등의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이 이노벡스관에 부스를 틀었다. 그 뿐 아니라 네덜란드나 프랑스, 덴마크 등이 별도 공간을 마련해 자국 스타트업을 소개했다. 앞서 밝혔듯 화려함은 다른 전시장보다 덜했을지 모르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볼거리는 사실 훨씬 많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가 올해 말 기준으로 사물인터넷 솔루션 중 절반 이상이 3년 미만 스타트업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예측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노벡스관에선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주로 다루는 아이템은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e커머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인공지능이다.

대만 현지 스타트업이 선보인 제품이 국내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대만 북동부 마을인 쓰펀(十分)에서 열리는 천등 날리기를 가상현실로 구현한 트립모먼트(Trip Moment)나 360도 이미지를 증강현실로 실시간 변환해주는 솔루션인 디그프로(Digpro), 저주파 치료기와 비슷하지만 휴대용 전동 마사지를 표방하는 유짐(U-gym) 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같은 곳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집중력 테스트 기기인 뉴로스카이(NeuroSky) 등이 선보인 아이템이나 아이디어 자체가 국내 스타트업과 크게 다르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컴퓨텍스에서 찾은 스타트업 베스트 11

차이점도 있다. 일단 국내에서도 요즘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지만 OEM 생산기지를 갖춘 대만 산업 구조 때문인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꽤 눈에 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하려면 제작 전 단계까지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단가 문제 탓에 결국 심천을 찾아야 하기 일쑤다.

물론 대만이라고 심천 같은 곳과 견줘 경쟁력이 더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만 산업의 중추에는 이미 대기업 일변도가 아닌 소규모 가내수공업 같은 형태가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타트업을 위한 생산지로서의 일정 입지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르가고 해야 할까. 어쨌든 대만 역시 생산 거점으로서의 주도권을 중국 쪽에 빼앗긴지 오래인 만큼 스타트업을 매개로 삼아 재기를 노리는 측면도 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차이는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의 말이 생각나 옮긴다. 아이디어나 아이템 자체는 국내 스타트업이 훨씬 뛰어난 게 많더라도 대만 스타트업 대부분이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 애완견 헬스케어 O2O 기업 관계자는 아예 서비스를 기획할 때부터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두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해외에 진출하는 국내 스타트업도 많지만 O2O 같은 분야는 대부분 로컬 서비스를 염두에 둔다는 것과 차이가 조금 있는 셈이다.

갈길 잃은 컴퓨텍스의 복안

컴퓨텍스가 볼 것 없는 잔치라는 말을 늘 부제로 달고 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노벡스관이 보여주는 시도가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는 말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을 Z세대라고 부른다. TV 같은 것보다 오히려 SNS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고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입에 물고(?) 나온 세대다. 이노벡스는 밀레니엄 세대 격인 컴퓨텍스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대와 소통하려는 시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컴퓨텍스가 ICT 시대의 변화에 맞춰 세대 공감에 성공할지 여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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