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1) – 사이버네틱스와 핵폭탄

무엇이든 역사를 기술하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특히나 인터넷과 웹이라는 기술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대철학과 사회과학 및 정치와 법제도, 그리고 글로벌 역학관계에 이르는 무수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현재를 이룬 녀석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유럽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전반을 조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아마도 이 연재를 언제 끝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일단 시작시점은 2차 세계대전 무렵으로 삼고자 한다. 물론, 연재를 진행하다 보면, 그 이전에 있었던 미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철학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연대별 접근을 취하는 이 연재에서는 지류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시작점과는 관계없이 자유롭게 언급하고자 한다.

노버트 위너와 존 폰 노이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글자 그대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집중하게 된다. 대학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대학의 연구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MIT의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계산기 연구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Source : http://flic.kr/p/69YL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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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버트 위너는 19세가 되기도 전에 형식논리학에서 대수학의 상이한 형식을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 위너는 러시아 태생으로 40개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였다고 하니 천재 집안의 피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노버트 위너는 청소년 시절에 전공인 수학 외에도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독일의 괴팅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이론물리학의 기초도 탄탄하게 닦았다고 한다. 이런 학문적인 노력을 서로 연결시켜 탄생시킨 개념이 사이버네틱스이다. 위너는 MIT에서 정년보장을 받았지만, 전 세계 유수의 대학의 객원교수직을 겸직했는데, 중국, 멕시코, 인도, 소련으로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가르쳤고, 죽음도 1964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맞이한 어찌보면 진정한 세계인이었다.

위너는 그의 제자 클로드 섀넌(Claude Elwood Shannon)과 함께 전자 스위치 회로에서 통신으로 전달된 ‘정보’ 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1942 년, 이 정보처리의 단위를 ‘binary digit’ 의 약어인 ‘비트(bit)’ 로 확정하였다. 이들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원자인 비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비트를 통해 디지털의 시대를 연 노버트 위너는 1948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책을 출간하여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사이버네틱스의 부제 ‘동물과 기계에서 제어와 통신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정보이론을 통해 오늘날의 컴퓨터과학, 제어계측공학, 전자공학, 네트워크 통신 등의 공학은 물론 신경생리학과 경제학, 심리학 영역까지 다룬 대단한 통섭적인 개념이다.

1940년 8 월, 영국 주변의 전선에서 독일 공군이 우위를 점해가자 MIT 에서 일하고 있던 위너는 연합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전쟁연구에 돌입했다. 노버트 위너가 만든 래드랩[Rad Lab, Radiation Laboratory]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탄도제어 연구에 참여하여 오늘날의 정보공학, 통신공학, 제어공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래드랩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과 인터넷 역사에 있어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또 하나의 연구기관은 세계경제학의 양대산맥 중 하나라고도 불려지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이다. 이 연구소는 평생동안 아무런 의무와 책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연구소인데, 그 첫 번째 종신교수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아인슈타인이 훨씬 유명하겠지만, 인터넷 역사에서는 폰 노이만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존 폰 노이만은 헝가리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수학연구 실적을 내고 있었다. 그는 193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 자격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1944년 오스카르 모르겐슈타인과 ‘게임과 경제행동 이론(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을 저술해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이론으로 취급되는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창시하기도 하였다. 게임이론은 원래 체스와 같은 게임에 숨어 있는 수학적 원리를 풀기 위해 고안되었다. 시장에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교환 행위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고, 교환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과 성립조건, 교환행위가 안정화되어 장기적 거래나 시장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등을 알아낼 수 있다면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노이만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실제적 거래에 주목하고, 구체적인 교환행위를 산술적으로 집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컴퓨터를 통한 디지털 방식을 도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노이만의 연구는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과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컴퓨터 개발의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게 되는데, 원자폭탄과
관련된 다양한 모의실험을 위해서는 빠른 속도로 계산할 수 있는 계산기가 필요했다. 이런 용도로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은 노이만의 자문을 받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제작했는데, 위너의 정보이론을 이용해서 비트로 논리연산을 하려고 하드웨어 스위치를 연결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 컴퓨터에 다른 일을 시키려면 전기회로를 모두 바꿔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이만이 제안한 것이 “프로그램을 내장한 컴퓨터” 방식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옆에 기억장치(memory)를 붙여서,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억장치에 저장해 놓았다가 사람이 실행시키는 명령에 따라 작업을 차례로 불러내어 처리하는 것으로 이 개념의 본질적인 아이디어는 영국의 앨런 튜링이 먼저 생각했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노이만이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어쨌든 노이만이 제시한 프로그램 내장방식과 컴퓨터의 구성요소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컴퓨터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대부분의 컴퓨터를 ‘폰 노이만 방식 컴퓨터’라고도 한다.

1949년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는 노이만의 개념을 도입한 에드삭(EDSAC)” 컴퓨터를 개발함으로써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컴퓨터가 탄생했다. 1945년 8월, 이론적인 원자폭탄의 위력이 일본에서 대참사로 나타나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며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고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했고, 원자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레오 질라드는 아예 전공을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노이만은 끝까지 핵폭탄 개발의 정당성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이 강력한 무장을 해야 한다”며 “소련에 수소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을 사전에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는 매우 역설적인 2가지 상황이 나타난다. 노이만은 1957년 골수암으로 숨을 거뒀는데, 그가 수소폭탄 실험에 직접 참관한 것이 암에 걸린 원인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를 세계 최고의 학자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게임이론으로 생각해도 미국과 소련의 핵개발 문제에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은 두 나라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은 컴퓨터와 인터넷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사건이다. 첫 편에서 소개한 노버트 위너와 존 폰 노이만은 그 역사의 시발점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최고의 통섭적인 학자이자 천재였고, 다방면의 학문에 능했지만, 두 사람의 접근방법은 상당히 달랐다. 노버트 위너가 종래의 객관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영역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후 윤리학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비과학적인 개념, 그리고 네트워크와 통신 등에 의한 연결을 중시한 사이버네틱스를 구상한 것에 비해, 노이만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디지털의 기술을 연결시켜 더욱 세련되고도 실질적인 새로운 연구 영역을 다수 구축하였다. 초기 컴퓨터의 발전과 산업화, 그리고 오늘날의 폭발적인 IT산업의 발전에는 노이만의 업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렇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의 부상과 미래에는 노버트 위너의 선견지명이 훨씬 와닿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 만의 착각일까?
(다음 편에 계속 …)

참고자료:
<과학혁명의 지배자들>, Ernst Peter Fischer 저, 이민수 옮김, 양문출판사, 2002

[kisti의 과학향기]폰 노이만과 프로그램 내장방식, 2009 아이뉴스 24 기사

 

글 : 정지훈
출처 : http://health20.kr/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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